[김형준의 다큐세상]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가 있다. 외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는 피디에겐 그런 나라가 죽을 맛이다. 주로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다. 가본 적 없는 곳이라면 더 초조해진다. 믿을 사람은 현지에 있는 코디뿐이다, 날마다 전화한다. 주고받는 대화는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이건 됩니까?” “글쎄요” “저건 됩니까?” “글쎄요.” 모조리 “글쎄요”다.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확답이 없다. 코디의 마지막 말은 정해져 있었다. “피디님, 여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니까요. 와보시면 알아요.”
고민이 고통으로 변질될 즈음 피디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 날 우리는 이집트 시골에서 파라오 시절의 농사를 재연해야 했다. 카이로에서 배우 30명을 실어왔다. 빌려온 고대 의상을 입히고 나무 삽과 괭이를 손에 쥐어줬다. 농가 한구석에 버려둔 쟁기도 찾아 황소 두 마리에 엮어 걸었다. 소몰이는 나이 많은 배우에게 맡겼다. 고증한 그림 그대로다.
완벽하다고 좋아했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리허설을 하기도 전에 황소가 갈지자를 그리며 날뛴다. 알고 보니 늙은 배우는 그날 처음으로 고삐라는 걸 잡았다. 소가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엔지(NG)는 소 탓이 아니라 배우 탓이었고, 잘못은 배우가 아니라 나한테 있었다. 왜 이집트 사람은 모조리 농사를 지을 줄 안다고 생각했을까?
몇 번을 반복해도 같은 꼴이다. 소를 모는 배우는 죽을 지경이고, 소 주인은 그 때마다 고삐를 잡아준다. 해결책은 찾았다.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인데 소 주인이라고 연기를 못할 리 없다. 배우 옷을 벗겨 소 주인에게 입혔다. 다행히 헤어스타일은 이집트 벽화대로다. 주인이 회초리를 들자 황소들은 고분해진다.
그제서야 큐 사인이 떨어졌다. 고대 이집트인이 괭이를 내려찍고 물을 붓고, 고대의 황소가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오케이’ 직전에 난데없이 청바지 입은 사내 하나가 카메라에 쑥 들어왔다. 옆 밭 주인이란다. 쇠스랑을 메고 서 있다. 다른 고랑부터 하면 안 되겠냐고 부탁해도 꼭 거기서부터 일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기 밭이라는데 할 말이 없다. 카메라를 들고, 모니터를 메고, 소를 끌고, 배우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다시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사내가 쪼르르 쫓아와 카메라 앞에 선다. 황당했다. 돈을 바라는 것 같다고 코디가 힌트를 준다. 나는 말했다. “그럼 빨리 돈 줘서 보내요.” 코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마을 사람 전부 몰려올 걸요.”
촬영 지점을 옮겨봤자 소용 없었다. 삼각대를 놓고 카메라를 돌리기만 하면 사내는 어느새 앵글 안에서 생글거린다. 자기가 카메라에 잘 잡히는지 팔로 가늠까지 한다.
카메라맨이 꾀를 냈다. 보조로 가져온 카메라 두 대를 더 돌리는 척 하자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고 타박을 줬지만, 곧 조연출이 한 대, 카메라 조수가 한 대씩 들고 배우 몇과 흩어졌다. 사내는 잠깐 갸우뚱거리다가 결국 가짜 카메라를 쫓아갔다.
촬영을 끝내고 마을을 벗어날 즈음 총소리가 울렸다. 코디가 승합차 커튼을 닫으라고 난리다. 또 그 사내인가 싶었는데 혁명이 끝난 뒤라서 어디든 치안이 불안하단다. “여긴 뭐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투덜거렸더니 코디가 한 마디 한다. “그렇다고 안 된 것도 없잖아요?”
김형준 / 교육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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