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 SBS)
[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 SBS)
<폭스 라이프>(FOX Life), 평일 새벽 2시, 4시30분, 오전 7시, 10시40분/주말 밤 1시, 새벽 3시, 5시, 오전 7시. 나이가 들수록 술자리가 싫어진다. 맨 정신으론 못할 말들이 술기운을 타고 떠다니는 것도 싫고, 은근슬쩍 말이 짧아지는 것도 싫다. 평소 해야 할 말은 묵혀두다가 꼭 만취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허심탄회한 척 슬쩍 꺼내는 인간들은 더 싫다. 오늘은 심지어 술기운에 친한 척하는 생판 남들과 같이 있으니, 양평동 이씨의 심기야 더 말해 뭐하랴. “이형은 그래 뭘 하시나?” 얼굴이 화투장처럼 빨개진 사내가 멋대로 첨잔을 해오며 물었다. 자의와는 무관하게 찰랑찰랑 채워진 잔을 보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냥 이거저거 하고 살아요.” 그때 테이블 저쪽에서 누군가 끼어든다. “에이, 이거저거가 뭐예요. 티브이 평론 하시면서.” 이런 제길, 내 이럴까봐 말을 줄인 건데. 상대의 직업을 파악한 화투장은 이제 대놓고 엉긴다. “티브이 평론 좋지! 그럼 우리 평론가 선생이 재미있는 프로 하나만 추천해 봐.” 왜 이렇게 엉기지? 왜 반말인데? 멋대로 어깨동무하지는 말지. 화투장이 어찌나 달라붙던지 앉은 자리에서도 목젖이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떼어낼 수 있으려나. 이씨는 술을 털어 넣고 말문을 열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라고 아세요?” “그런 게 있나?”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이 만든 작품입니다. 신구하고 노주현이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작품이죠.” “뭐 있다 치고, 그게 왜 좋은데?” “등장인물 보는 재미죠. 노주현은 둔하고 게으른 식탐 덩어리고, 신구는 쓸데없이 고집만 세죠. 이홍렬은 한번 삐치면 답이 없는 좁쌀영감이고요.” “독특한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서 재미있는 건가?” 화투장이 술병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독특하긴요. 죄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사람들이라서 재미있는 거죠. 보면서 공감을 해야 웃기도 하고 자기성찰도 할 거 아닙니까. 우리도 모두 게으른 식탐 덩어리이거나, 고집불통 꼰대거나 소심한 좁쌀영감이잖아요? 아저씨나 나나 말이죠.”
화투장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씨는 개의치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망년회마다 ‘술 한잔 따라보라’고 말하는 상사한테 주먹을 날려 전설이 된 여직원이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거든요. 극단적인 상황이라 웃기는 걸까요? 아니죠. 어디든 여자 부하직원한테 술 따라보라고 뻗대는 진상들이 하나씩은 있으니까 통쾌해서 웃는 거지요. 물론 누군가는 좀 찔리겠지만.”
말을 끝낸 이씨는 화투장을 바라보았다. 화투장의 손에는 아직 술병이 들려 있었다. 이씨가 미소와 함께 조용히 잔을 뒤집어 세우자, 화투장은 잠시 어물거리다가 다른 테이블로 퇴각했다. 살다 보니 김병욱 감독님께 이런 식으로 신세를 다 지는구나.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폭스 라이프>(FOX Life), 평일 새벽 2시, 4시30분, 오전 7시, 10시40분/주말 밤 1시, 새벽 3시, 5시, 오전 7시. 나이가 들수록 술자리가 싫어진다. 맨 정신으론 못할 말들이 술기운을 타고 떠다니는 것도 싫고, 은근슬쩍 말이 짧아지는 것도 싫다. 평소 해야 할 말은 묵혀두다가 꼭 만취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허심탄회한 척 슬쩍 꺼내는 인간들은 더 싫다. 오늘은 심지어 술기운에 친한 척하는 생판 남들과 같이 있으니, 양평동 이씨의 심기야 더 말해 뭐하랴. “이형은 그래 뭘 하시나?” 얼굴이 화투장처럼 빨개진 사내가 멋대로 첨잔을 해오며 물었다. 자의와는 무관하게 찰랑찰랑 채워진 잔을 보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냥 이거저거 하고 살아요.” 그때 테이블 저쪽에서 누군가 끼어든다. “에이, 이거저거가 뭐예요. 티브이 평론 하시면서.” 이런 제길, 내 이럴까봐 말을 줄인 건데. 상대의 직업을 파악한 화투장은 이제 대놓고 엉긴다. “티브이 평론 좋지! 그럼 우리 평론가 선생이 재미있는 프로 하나만 추천해 봐.” 왜 이렇게 엉기지? 왜 반말인데? 멋대로 어깨동무하지는 말지. 화투장이 어찌나 달라붙던지 앉은 자리에서도 목젖이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떼어낼 수 있으려나. 이씨는 술을 털어 넣고 말문을 열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라고 아세요?” “그런 게 있나?”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이 만든 작품입니다. 신구하고 노주현이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작품이죠.” “뭐 있다 치고, 그게 왜 좋은데?” “등장인물 보는 재미죠. 노주현은 둔하고 게으른 식탐 덩어리고, 신구는 쓸데없이 고집만 세죠. 이홍렬은 한번 삐치면 답이 없는 좁쌀영감이고요.” “독특한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서 재미있는 건가?” 화투장이 술병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독특하긴요. 죄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사람들이라서 재미있는 거죠. 보면서 공감을 해야 웃기도 하고 자기성찰도 할 거 아닙니까. 우리도 모두 게으른 식탐 덩어리이거나, 고집불통 꼰대거나 소심한 좁쌀영감이잖아요? 아저씨나 나나 말이죠.”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