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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여자는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등록 2012-09-15 11:20

<아랑사또전>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불러낸다. 드라마 속에서 늘상 폭력을 당해 온 피해자였던 여성이 복수의 집행자가ㅣ 됐다. MBC 제공
<아랑사또전>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불러낸다. 드라마 속에서 늘상 폭력을 당해 온 피해자였던 여성이 복수의 집행자가ㅣ 됐다. MBC 제공
<아랑사또전>, ‘보이지 않는 존재’인 그들의 현실이 근원적 공포
남성이 독점해온 공적 복수 서사의 가능성 보여줘
TV 드라마에 살해당한 여성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 얼마 전 종영된 화제작 SBS <추적자>와 <유령>은 둘 다 여성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추적자>에서는 17살 소녀 백수정(이혜인)이 거대권력에 의해 몇 번에 걸쳐 살해당했고, <유령>에서는 톱 여배우 신효정(이솜)이 자살로 위장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MBC <해를 품은 달>과 SBS <옥탑방 왕세자> 또한 세자빈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공통된 미스터리가 극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MBC <아랑사또전>은 억울하게 죽임당한 여성 원혼들의 집결지와도 같다. 이쯤 되면 올해를 ‘여귀의 해’로 불러도 무방할 지경이다.

죽은 원혼이 떠도는 TV, 여귀의 해

<아랑사또전>은 경남 밀양의 아랑 전설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그녀를 겁탈하려는 고을 통인에게 반항하다 살해당하고, 원귀가 되어 밤마다 밀양 사또들에게 나타나 마침내 한을 푼다는 내용의 전설이다.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밀양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서사를 통해 반복돼 나타나는 가장 원형적인 여성 원귀 설화 중 하나이며, ‘아랑형 전설’로 통칭되기도 한다. 이 설화의 핵심은 정절을 지키려다 성폭행·살해당하고 부정하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쓴 여성이 한을 품고 원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근원적인 공포와 한이 반영돼 있다.

드라마는 그러한 아랑 전설의 한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나간다. 이 작품의 플롯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억실조증인 원귀 아랑(신민아)이 자신이 누구였는지, 왜 죽었는지를 알아가는 추적기고, 다른 하나는 은오(이준기)가 어머니 서씨(강문영)의 행방을 찾는 이야기다. 두 플롯의 중심에는 여성의 실종이라는 공통된 모티브가 놓여 있다. 아랑은 생전의 자신이 전임 밀양 사또의 실종된 딸 이서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은오는 어머니의 사례 역시 아랑 사건과 관련된 실종이라는 단서를 쥐게 된다. 그리고 둘이 함께 진실을 파헤치던 중 더 많은 여성들의 실종과 마주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여성들이 실종 이전부터 이미 ‘보이지 않는 존재’와 같았다는 점이다. 아랑은 서림이었을 당시 하도 음전한 처자여서 “마을에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실종된 뒤에는 통인과 야반도주했다는 누명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또한 서씨는 세도가 김응부 대감으로부터 아들을 낳았지만 후처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무명의 노비일 뿐이고, 사라진 뒤에도 은오 외에는 그녀의 부재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녀들뿐 아니라 고을에서 사라진 처녀들의 실종 역시 수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가령 은오가 밀양 사또로 부임한 뒤 아랑의 과거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미해결 살인사건의 검안서를 살피는 장면에서 책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치정에 휘말린 여성들의 죽음, 즉 본보기로 남아야 할 정조 규범 위반 사례들이다. 여성들은 아랑처럼 잔혹한 전설의 주인공으로 떠돌지언정 살아서도 죽어서도 공적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요컨대 <아랑사또전>은 아랑 전설에 담긴 여성들의 근원적 공포가 곧 사회적으로 비가시적 존재와 다름없는 그들의 현실에 대한 공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수하고 거래하는 ‘한 품은’ 여자

아랑 전설은 아랑의 사연을 들은 사또가 살해범을 처벌한 뒤 그녀의 장례식을 통해 넋을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올해 여성들의 의문사를 다룬 드라마들에서도 사건을 수사해나가는 이들은 모두 공권력을 쥔 남성이었다. 여성 원귀가 한을 풀려고 사또에게 사정하고 그 남성들이 복수의 집행자가 되는 구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랑사또전>이 아랑 전설을 재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드라마는 희생당하는 여성과 그 죽음에 대한 수사와 복수를 대리하는 남성이라는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 원귀 아랑은 ‘상제의 법’을 위반하며 결국엔 자신의 죽음과 얽힌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 자’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아랑사또전>이라는 제목은 아랑과 사또의 이야기라기보다 아랑이 곧 사또가 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올해는 유독 현실에서도 아랑 전설과 같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드라마에서 여성들의 의문사가 많았던 것은, 사회의 폭력이 최약자층인 여성과 아이에게 갈수록 집중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복수의 서사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그간 여성 복수의 서사는 공적 언어를 갖지 못한 여귀의 원한풀이로 대표되는 사적 복수가 대부분이었다. <아랑사또전>은 옥황상제와의 거래를 통해 직접 복수의 집행자가 되기로 한 아랑을 통해 오랜 시간 남성이 독점해온 공적 복수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지만 이 아랑 전설의 재구성을 자꾸만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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