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화제 속에 막을 내렸다. 사랑에 빠진 고교생들의 애틋한 표정 위로 흘러나오던 ‘그 노래’에서 저마다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30살을 전후한 우리 세대가 누리는 행운이다. 음악은 냄새처럼 어떤 시절의 상황과 기분을 신선하게 냉장시켜주는 신기한 캡슐 같은 거라고 난 생각한다.
케이팝의 전성시대를 살고 있다지만 나는 아직도 가요의 절정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짧은 몇 년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시대가 준 음악의 세례 덕분에, 나는 스스로와 썩 어울리지 않는 예능 피디가 될 수 있었다. 멜로디와 가사에 감정이 담겨 있어도 올드하거나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지 않았던 때의 얘기다.
소녀시대의 노래처럼 ‘전세계가 우릴 주목하는’ 시대, “싸이를 보라. 케이팝은 이제 세계적인 현상이며” 어쩌고 하는 지금, <뮤직뱅크>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이따금 내가 느끼는 이상한 결락감의 정체는 뭘까.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서른세 살의 직장인이 되었을 때 티아라의 ‘섹시 러브’를 들으며 학원 남자친구와의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게 될까? 내가 김동률의 ‘취중진담’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순간이나 감정들 같은 것을.
맥락과 감정이 결여된 노래가 탄생하게 된 것은 설명하자면 너무 긴 산업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 산업적 이유 속에는 우리 세대가 저지른 불법복제와 음악에 대한 수전노 같은 태도도 포함되어 있다. 죄를 지었던 것이 우리 세대다. 징징댈 권리가 없다.
더구나 맥락과 감정이 결여된 제작 방식 덕택에 ‘전세계가 우릴 주목하게 된’ 부분도 있다. ‘컬처 엔지니어링’을 고안해 낸 선구적인 음악 제작자분들께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매주 바라보는 무대는 내가 학생 때 보던 무대보다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느끼는 결핍감이 해소되진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 ‘내가 들었던 음악이 최고’라고 말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발매되는 순간 철저히 감상자의 소유물이 되는 거라고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말한다. 아직 ‘우리 엄마의 최고’가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이크’인 것처럼 나에게도 윤상과 김현철과 젝스키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어린아이들에게 ‘김동률이 최고’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말했듯 음악은, 아니 어떤 음악을 듣는다는 경험만큼은 각자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아라의 ‘섹시 러브’에서 고교 시절의 어떤 감정을 유추해내야 하는 세대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모든 것을 부정하고 갑자기 ‘콕스’나 ‘브로콜리 너마저’를 숭배해야 하는 단절을 경험해야 하는 그런 세대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안타깝다.
대중음악은 한 시대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큰 힘이 있다. 난 ‘그 시절의 유행가’라는 게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유행가라는 것은 상황과 계절과 맥락과 사람이 살고 사랑하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별과 연령, 빈자와 부자를 초월하는 보편적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우리 인생은 클럽에서 남자 여자 만나는 일이 다가 아니다. ‘이 노래가 어쩌면 내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라는 느낌을 지금 고등학생들이 받을 수 있다면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지금의 노래는 ‘오빠들의 얘기’일 뿐이다. 듣는 사람이 객체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선 안 된다. 우리의 삶은 그보다 훨씬 초라하지만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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