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싸이
틀 깨부순 ‘두 통령’
서태지와 싸이, 그리고 한국음악
서태지와 싸이, 그리고 한국음악
역사를 다시 썼다. 과한 표현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나. 지난 7월15일 유튜브에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이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세계에서 세운 기록은 읊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다. 아메리칸 톱 40 진입, 아이튠스 스토어 싱글 차트 1위,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 영국 유케이(UK) 싱글 차트 1위, 7주 만에 유튜브 조회수 2억회 돌파, 유튜브 사상 가장 많은 사용자가 추천한 비디오로 기네스 인증.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기관사는 강남역을 안내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강남”이라 말하고, 미국 엘몬트시에서는 수영장 안전요원들이 수영장에서 ‘강남스타일’ 패러디 영상을 찍었다가 ‘공공시설물의 사적 이용’을 이유로 무더기 해고를 당하는가 하면, 타이에서는 갱단들이 ‘강남스타일’로 춤 대결을 벌이다가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노래 한 곡 때문에 사람이 해고되고 갱단이 방아쇠를 당기는 이 웃지 못할 범지구적 현상. 애초에 일본 진출 정도만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곡이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린 이 예기치 않은 성공에 언론도 놀랐고 음반업계도 놀랐으며 무엇보다 싸이 자신도 놀랐다. ‘강남스타일’의 말도 안 되는 성공에 놀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저마다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성공의 비결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결론은 세 가지 정도로 수렴됐다. 첫째 “유튜브는 광대해”, 둘째 “날 이렇게 웃긴 가수는 네가 처음이야”, 셋째 “뭐야, 웃기는 놈이 노래도 잘 만들잖아”.
그렇다면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남스타일’ 이후다. 뜬금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거의 ‘사고’에 가까운 성공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혹자는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보고 비틀스와 아바를 들먹이며 한국의 케이팝이 세계에 진출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1990년대 중반 전세계를 반짝 수놓고 사라져간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 열풍과 다를 게 없는 현상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바를 꿈꾸는 호들갑과 로스 델 리오를 말하는 냉혹함의 간극은 거대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연 가능성의 공간이 그만큼 광활하다는 것을 뜻한다.
싸이의 미래가 아바가 될지, 로스 델 리오가 될지는 그가 다음 앨범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이뤄놓은 것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도는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싸이의 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그 지점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잠시 시계를 돌려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92 문화대통령
제도권 교육 박차고 나온
싱어송라이터 서태지
‘한국말 랩’ ‘댄스에 메탈’
서구 사운드를 우리 식으로
낯선 충격파 한국 뒤흔들어 1992년 4월11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연예프로그램 <특종! 티브이 연예>에는 색다른 코너가 있었다. 그 주에 새로 나온 곡들을 소개하고 개중 한 팀을 초청해 직접 무대를 마련해주며,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들어보는 코너. 코너 이름은 직관적이게도 ‘신곡 무대’였다. 신인들을 평가해주는 것치고는 심사위원의 면면이 어마어마했는데, 변진섭이 부른 ‘홀로 된다는 것’의 작곡가 하광훈,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를 쓴 작사가 양인자, ‘세시봉’ 시절부터 한국 연예계를 가장 지척에서 들여다본 연예평론가 이상벽,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 겸 프로듀서 전영록의 조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드림팀이었다. 이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무대에 처음으로 도전한 그룹은 한 남성 ‘트리오’ 그룹이었다. 지금 들으면 다소 촌스러운 그룹 이름은 당시만 해도 평범한 축에 끼었다. 아니, 한국 가요계에 유구히 내려오는 작명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도 좋겠다. 신중현과 엽전들, 나미와 머슴아들, 현철과 벌떼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별날 것 없는 그룹명, 얌전하고 앳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들의 무대는 충격적이었다. 조밀하게 쪼개진 비트와 신시사이저가 빚어내는 리듬은 하광훈이 칭찬한 것처럼 ‘상당히 좋았’고, 안무는 동시대 최고의 춤꾼들이었던 박남정이나 김완선의 무대와 비교해도 신선하고 과격했다. 노래가 아니라 한국어 랩이 전면에 나선 곡의 구성도 당시로선 낯선 것이었다. 낯설고 충격적인 무대. 심사위원들은 신인치곤 나쁘지 않은 점수를 주었다. 10점 만점에 7.8점.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은 그 무대에 7.8점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플에 시달린다. 심사위원들의 미적지근한 평과는 달리 방송이 나가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자, 학교에서 만난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그 신인 그룹의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야, 너 걔네 봤냐? 누구 말이야? 그 왜, 토요일에 신인무대에 나온 애들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서태지와 친구들이라던가? 아냐. 서태지와 아이들. 그래,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친근함을 내세우는 일본식 아이돌 시스템을 들여와 만든 그룹 소방차와 야차가 있었지만, 서태지는 그들과는 좀 달랐다. 만 19살이라는 앳되기 짝이 없는 나이, 은테 안경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빛과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 피부,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일단 전에 없던 비트는 10대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전국의 10대들이 그에게 열광했고, 그를 따라 대중문화 소비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열광했던 건 비단 10대만이 아니었다. 소련 붕괴 후 이상향을 잃고 방황하다 대중문화판으로 흘러들어온 일군의 386들은 ‘댄스에 메탈을 접목하고, 제도권 교육을 박차고 나왔으며, 직접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서태지에게서 록의 저항정신을 보았다. 게다가 가사도 은근히 심오하지 않나.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환상 속의 그대’ 중) 길을 잃고 헤매던 이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 2집을 들고나온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메가톤급 성공이 있었다. 동시대 뮤지션 중 흑인음악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다고 평가되는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얼마나 폭발적인 히트를 쳤는고 하니, 바로 한 해 전 터졌던 대마초 흡입사건 따위는 대중의 기억 저 멀리 날려버릴 정도였다. 후드 티셔츠를 입은 소년들이 길바닥을 메웠고, 전국의 가정에서 ‘저놈의 똥싼 바지’를 놓고 갖다버리려는 어머니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아들들의 전쟁이 발발했다. 2012 유튜브대통령
우발적 사고처럼 빵 터져
세계를 웃겨버린 싸이
반짝 ‘마카레나 열풍’에 머물지
아바 비견될 세계진출이 될지
‘강남스타일’ 가능성 광활 같은 해 ‘난 알아요’와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자웅을 겨루는 이 진풍경은 한국 가요계의 흐름을 완전히 비틀어 쐐기를 박아버렸는데, 가요계의 주류 흐름이 트로트로부터 댄스팝으로 완전히 넘어온 것이다. 그다음해 ‘현진영과 와와’ 출신의 듀오 듀스(DEUX)가 등장하면서, 바야흐로 가요계는 댄스팝 천하가 되었다. 말하자면 “오-에-오” 하면 “오에-오에-오” 하고, “현진영 고” 하면 “진영 고”라는 화답이 온 천지를 뒤덮던 시절.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실질적인 한국의 1990년대의 시작이었다. 1990년은 그저 숫자의 전환에 불과했고, 1991년 소련의 붕괴는 1980년대의 종말이었다. 낡은 것들은 사라져갔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 공간에 갑자기 서태지가, 현진영이, 김성재와 이현도가, 뉴 잭 스윙(흑인음악의 한 유형)이 도착했다. 그때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가 같은 시기에 들고나온 장르가 전부 뉴 잭 스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로부터 시작한 이 장르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 팝 시장을 휩쓸었던 지배적 장르였는데,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뉴 에디션과 밀리 바닐리, 바비 브라운을 거쳐 크리스 크로스까지 꾸준하게 이어진 당대 최신 트렌드였다. 그리고 동시대에 뉴 잭 스윙 계열의 곡을 들고나온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의 목표는 사실 “우리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다/할 수 있다”에 가까웠다. 저 멋있고 근사한 ‘최신상’ 트렌드를 우리도 한국어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어찌나 강했던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툭하면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 이츠 트루’의 표절곡이 아니냐는 논란에 시달린다. 비단 서태지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 댄스팝 역사의 새벽을 연 이 셋의 곡들을 지금 다시 들어보면, 그들이 레퍼런스로 삼은 선배들이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현진영은 바비 브라운과 크리스 크로스를, 이현도는 뉴 잭 스윙의 아버지 테디 라일리를. “영어로” “현지 트렌드로” 억누르던 ‘케이팝 콤플렉스’ 얼결에 날려 이런 일이 댄스팝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발라드의 새 장을 열었다 평가되는 윤상만 해도 처음에는 일본 음악이나 제3세계 음악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고, 히사이시 조나 사카모토 류이치의 팬들은 윤상의 작품들을 고운 눈으로만 볼 순 없었다. 1990년대 초반 댄스팝과 발라드 장르를 새로 써내려간 젊은 선구자들이 초창기 모두 레퍼런스의 과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 레퍼런스들이 당시 그들이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최신의 트렌드였다는 것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시사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 가요계를 지배했던 강박이 다름 아닌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선 1980년대의 반동이었다. 서구의 문물을 반강제적으로 급하게 받아들였던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의 강박은 사실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1980년대는 그 강박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짓눌렸던 시대였다. 두 손 가득 피를 묻히고 권좌에 앉긴 했는데, 앉고 보니 정통성도 정당성도 아무것도 없어 난감했던 전두환은 어떻게든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 것’에 대한 집착을 세상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국정 4대 지표 중 하나로 ‘민족문화 창달’을 내세울 정도였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 것’에 대한 목마름이 정권 차원만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유신과 맞서 싸운 젊은이들은 전통 유희로부터 해학과 풍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투쟁 현장에 수용했다. ‘노래굿’이라는 장르명을 고수했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있었고, 김지하의 ‘오적’이 있었으며, 채희완이 주도했던 탈춤운동이 있었다. 정권 차원의 강박과 아래에서부터 자생된 움직임이 1980년대의 시공간에서 조우한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의 시작은 뮤지션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이제 자신들의 문화적 자양분이 된 해외 트렌드를 대놓고 한국에서 펼쳐 보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한국 가요의 최선봉에 서 있던 이들은 해외 뮤지션들의 사운드를 한국에서 구현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대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해외 트렌드와 무관하게 꾸준히 자기 음악을 하던 아티스트들도 사운드에서는 영미권의 수준을 따라잡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승환은 적자를 감수해가며 미국 현지의 사운드 엔지니어들을 고용했고, 이승철은 아예 뉴욕에서 4집 <색깔 속의 비밀> 녹음을 마쳤다. 김승진과 소방차로는 성이 안 차 물 건너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토미 페이지에게 열광했던 이들은, 이제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윤상과 이승환을 들으며 열광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우리도 저런 것 할 수 있어’라는 강박은 ‘외국 시장에서 직접 인정받고 싶어’로 자라났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참고했던 해외 뮤지션들의 색깔 위에 자신의 개성을 얹는 데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그렇다면 한번 겨뤄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하긴 했지만, 당시에도 한국의 음악시장은 너무 좁았다.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영화 <쥬라기 공원>이 벌어들인 돈이 현대자동차 1년 수익보다 크다”며 문화팽창주의를 살살 간질이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미 1989년 영국에 진출하려 했던 김도균과 임재범이 있었고,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일본 진출 시도가 있었다. 김완선은 대만을 공략했고, 넥스트를 해체한 신해철은 훌쩍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지 시장을 공략한 음반 <모노크롬>을 출시했다. 모두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김완선을 제외하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당대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해외 시장에서 실패를 맛봤다.
해외 시장의 가능성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화방송>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중국 수출에 힘입은 안재욱의 중국 시장 진출과, 에이치오티(H.O.T.)의 중국 시장 진출, 그리고 댄스 듀오 클론의 대만 시장 진출이 그것이었다. 김완선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예열되어 있던 중화권 시장은 이들의 진출에 호의적이었다. 안재욱은 현지에서 국빈 대우를 받았고, 에이치오티 또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으며, 클론은 ‘대만의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개인의 개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한국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정교하게 기획된 가수들이 먼저 해외의 응답을 받게 된 것이다. 어럽쇼, 이거 봐라. 음악적 접근이 실패한 자리에 돋아난 산업적 접근의 가능성은 제작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했다.
그 시점에서 ‘외국 시장에서 직접 인정받고 싶어’라는 강박은 어느새 ‘외국 시장에 진출해야 해’라는 강박으로 바뀐다. 때마침 한국의 음반 시장도 서서히 수축하기 시작했으니까.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엠피3(MP3)의 등장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히트곡만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장사에 여념이 없던 국내 제작자들의 근시안적 행보는 한국 음반 시장의 붕괴를 불러왔다. 예전엔 ‘해외 진출을 하고 싶다’ 수준이었던 문제가, 이제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로 커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에이치오티와 안재욱과 클론의 예가 있긴 했지만, 매번 그렇게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선봉에 이수만의 에스엠기획이 나섰다.
에이치오티의 중국 시장 진출로부터 해외 시장 개척의 산업적 가능성을 보았던 이수만은 아예 시작부터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보아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선구안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대중음악계와는 차원이 다른 리그라 여겨졌던 일본으로의 진출은 도박에 가까웠다. 다행히 도박은 잭팟으로 돌아왔다. 일본어를 공부해서 통역 없이 활동하고, 현지 작곡가를 기용해 만든 현지 트렌드에 맞춘 곡을 발표하는 방식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계은숙, 김연자와 조용필 이후 맥이 끊겼던 일본 시장의 문이 다시 열리자, 후속타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모든 아이돌 그룹은 잠재적인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고, 특히 이수만의 다음 작품이었던 동방신기와 천상지희는 그룹명부터 일본과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보아의 일본 히트곡들이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히트를 치면서 내수 시장용 음반과 일본 시장용 음반 사이의 차이도 점점 사라져갔다. 아예 내수 시장용 곡을 쓸 때부터 현지 팬들을 고려하고 곡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당연히 진출해야 하는 곳처럼 여겨졌다. 일본까지 진출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우리 것 강요·서구문물 급하게 수용한
1980년대에 대한 반동이 90년대 지배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 강박 2000년대엔 외국시장 공략
보아·동방신기 현지화 전략으로
미국문 두드렸지만 실패 2005년 나온 유튜브가 케이팝 확산
영미권 트렌드와 거리 먼 싸이
모든 강박관념 내려놓고도 어필 이 무렵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보아가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김범수가 자신의 영문 이니셜 비에스케이(BSK)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장에 싱글 앨범을 낸 것이다. 우연히 김범수의 ‘하루’를 들은 미국의 유명 아르앤비(R&B) 프로듀서 케그 존슨이 김범수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미국 현지의 한인 레이블 국도레코드가 동참하며 성사된 프로젝트였다. ‘하루’는 현지 색깔에 맞춰 편곡되어 ‘헬로 굿바이 헬로’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고, 국도레코드의 헌신적인 프로모션 끝에 빌보드 100 세일즈 차트에 51위까지 올랐다. 비록 편곡을 거치긴 했지만 한국 가요 특유의 ‘뽕기’를 완전히 지우진 못했던 ‘헬로 굿바이 헬로’ 한 곡만 세 가지 버전으로 담아낸 싱글 앨범으로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차트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가수가 빌보드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때는 다들 알지 못했다.
한편 아시아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던 ‘한류’ 스타들은 2005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의 등장과 함께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제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관객들에게 뮤직비디오를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 박진영과 이현도가 미국에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진출해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던 시기였고, 알음알음 퍼져가며 동유럽부터 남미까지 전세계에 조금씩 팬을 키워가던 동방신기의 존재는 제작자들에게 ‘굳이 아시아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심어줬다. ‘우리도 저런 것 할 수 있어’로 시작했던 강박관념이 음악적 가능성과 산업적 가능성을 거쳐, 중국과 일본, 동남아를 순회한 끝에 마침내 한국에 처음으로 ‘저런 것’의 모델을 보여줬던 ‘본토’ 미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단계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미국 시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일본 시장에 진출할 때처럼, 철저히 현지 트렌드에 맞춘 앨범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린 세븐과 보아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시아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던 비는 정작 노래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출연으로 미국 시장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고, 본토 모타운 사운드를 표방한 ‘레트로 3부작’으로 미국을 공략하려 했던 원더걸스는 안타깝게 아직까지도 주류 시장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미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정서가 제작자들 사이에 다시 돌았다.
차라리 반응은 직접 진출이 아닌 인터넷을 타고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빅뱅과 투애니원,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투피엠과 미쓰에이 등 아시아 시장에서 강력한 팬덤을 이끌고 있던 한류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를 돌아다니던 서구 시장의 팬들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을 발견한 기획사에서 재빨리 아이튠스 스토어에 음반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류’라는 용어 외에도 영어문화권을 노린 ‘케이팝’이라는 조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케이팝을 따라 부르는 팬들의 인구도 점점 증가했다. 하지만 케이팝 열풍조차 여전히 서구 시장의 주류와는 별개의 흐름이었다. 여전히 케이팝 열풍은 독특한 취향을 지닌 리스너들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미국 시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느닷없이 유튜브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혹자는 싸이의 버클리 유학 경력을 거론하며 그의 음악적 뿌리를 영미권 음악으로부터 찾으려고 하지만, 데뷔하던 시점부터 싸이는 당대 영미권 음악시장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걸었다. 그가 데뷔곡 ‘새’를 선보였던 그해, 미국에선 어셔와 넬리가 넵튠스 스타일의 곡들을 선보였고, 매치박스 트웬티와 라이프하우스의 강세는 차라리 록 음악의 재래를 말하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 댄스곡을 리믹스한 불법 믹스 테이프를 팔아 용돈을 벌던 싸이의 음악적 자양분은 명백하게도 한국의 클럽문화였다. 1990년대 초반 한국 대중음악에서 서구 사운드를 자기 식으로 구현해보려 했던 선배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소년이, 세계 음악시장의 조류를 좇기보단 자신의 원류에 충실한 음악을 들고나온 것이다. 그 결과물인 ‘강남스타일’의 세계적인 성공은,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오랜 시간 앓아온 강박관념을 얼결에 깨부숴버렸다. 아주 오랫동안 서구 음악시장과 같은 시간대에 편입되고 싶어했던 한국의 대중음악이, 사실은 이미 그 시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굳이 현지 트렌드를 과도하게 따라가지 않아도, 영어로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물론 이걸 두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과잉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강박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겠다’는 강박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의 방식대로 만든 내수 시장용 트랙의 범세계적 히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싸이가 ‘원 히트 원더’로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오랫동안 앓아온 콤플렉스가 마침내 해소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싸이가 이뤄놓은 것은, 그리고 그의 다음 행보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승한/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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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교육 박차고 나온
싱어송라이터 서태지
‘한국말 랩’ ‘댄스에 메탈’
서구 사운드를 우리 식으로
낯선 충격파 한국 뒤흔들어 1992년 4월11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연예프로그램 <특종! 티브이 연예>에는 색다른 코너가 있었다. 그 주에 새로 나온 곡들을 소개하고 개중 한 팀을 초청해 직접 무대를 마련해주며,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들어보는 코너. 코너 이름은 직관적이게도 ‘신곡 무대’였다. 신인들을 평가해주는 것치고는 심사위원의 면면이 어마어마했는데, 변진섭이 부른 ‘홀로 된다는 것’의 작곡가 하광훈,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를 쓴 작사가 양인자, ‘세시봉’ 시절부터 한국 연예계를 가장 지척에서 들여다본 연예평론가 이상벽,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 겸 프로듀서 전영록의 조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드림팀이었다. 이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무대에 처음으로 도전한 그룹은 한 남성 ‘트리오’ 그룹이었다. 지금 들으면 다소 촌스러운 그룹 이름은 당시만 해도 평범한 축에 끼었다. 아니, 한국 가요계에 유구히 내려오는 작명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도 좋겠다. 신중현과 엽전들, 나미와 머슴아들, 현철과 벌떼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별날 것 없는 그룹명, 얌전하고 앳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들의 무대는 충격적이었다. 조밀하게 쪼개진 비트와 신시사이저가 빚어내는 리듬은 하광훈이 칭찬한 것처럼 ‘상당히 좋았’고, 안무는 동시대 최고의 춤꾼들이었던 박남정이나 김완선의 무대와 비교해도 신선하고 과격했다. 노래가 아니라 한국어 랩이 전면에 나선 곡의 구성도 당시로선 낯선 것이었다. 낯설고 충격적인 무대. 심사위원들은 신인치곤 나쁘지 않은 점수를 주었다. 10점 만점에 7.8점.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은 그 무대에 7.8점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플에 시달린다. 심사위원들의 미적지근한 평과는 달리 방송이 나가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자, 학교에서 만난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그 신인 그룹의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야, 너 걔네 봤냐? 누구 말이야? 그 왜, 토요일에 신인무대에 나온 애들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서태지와 친구들이라던가? 아냐. 서태지와 아이들. 그래,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친근함을 내세우는 일본식 아이돌 시스템을 들여와 만든 그룹 소방차와 야차가 있었지만, 서태지는 그들과는 좀 달랐다. 만 19살이라는 앳되기 짝이 없는 나이, 은테 안경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빛과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 피부,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일단 전에 없던 비트는 10대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전국의 10대들이 그에게 열광했고, 그를 따라 대중문화 소비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열광했던 건 비단 10대만이 아니었다. 소련 붕괴 후 이상향을 잃고 방황하다 대중문화판으로 흘러들어온 일군의 386들은 ‘댄스에 메탈을 접목하고, 제도권 교육을 박차고 나왔으며, 직접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서태지에게서 록의 저항정신을 보았다. 게다가 가사도 은근히 심오하지 않나.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환상 속의 그대’ 중) 길을 잃고 헤매던 이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 2집을 들고나온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메가톤급 성공이 있었다. 동시대 뮤지션 중 흑인음악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다고 평가되는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얼마나 폭발적인 히트를 쳤는고 하니, 바로 한 해 전 터졌던 대마초 흡입사건 따위는 대중의 기억 저 멀리 날려버릴 정도였다. 후드 티셔츠를 입은 소년들이 길바닥을 메웠고, 전국의 가정에서 ‘저놈의 똥싼 바지’를 놓고 갖다버리려는 어머니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아들들의 전쟁이 발발했다. 2012 유튜브대통령
우발적 사고처럼 빵 터져
세계를 웃겨버린 싸이
반짝 ‘마카레나 열풍’에 머물지
아바 비견될 세계진출이 될지
‘강남스타일’ 가능성 광활 같은 해 ‘난 알아요’와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자웅을 겨루는 이 진풍경은 한국 가요계의 흐름을 완전히 비틀어 쐐기를 박아버렸는데, 가요계의 주류 흐름이 트로트로부터 댄스팝으로 완전히 넘어온 것이다. 그다음해 ‘현진영과 와와’ 출신의 듀오 듀스(DEUX)가 등장하면서, 바야흐로 가요계는 댄스팝 천하가 되었다. 말하자면 “오-에-오” 하면 “오에-오에-오” 하고, “현진영 고” 하면 “진영 고”라는 화답이 온 천지를 뒤덮던 시절.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실질적인 한국의 1990년대의 시작이었다. 1990년은 그저 숫자의 전환에 불과했고, 1991년 소련의 붕괴는 1980년대의 종말이었다. 낡은 것들은 사라져갔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 공간에 갑자기 서태지가, 현진영이, 김성재와 이현도가, 뉴 잭 스윙(흑인음악의 한 유형)이 도착했다. 그때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가 같은 시기에 들고나온 장르가 전부 뉴 잭 스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로부터 시작한 이 장르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 팝 시장을 휩쓸었던 지배적 장르였는데,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뉴 에디션과 밀리 바닐리, 바비 브라운을 거쳐 크리스 크로스까지 꾸준하게 이어진 당대 최신 트렌드였다. 그리고 동시대에 뉴 잭 스윙 계열의 곡을 들고나온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의 목표는 사실 “우리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다/할 수 있다”에 가까웠다. 저 멋있고 근사한 ‘최신상’ 트렌드를 우리도 한국어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어찌나 강했던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툭하면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 이츠 트루’의 표절곡이 아니냐는 논란에 시달린다. 비단 서태지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 댄스팝 역사의 새벽을 연 이 셋의 곡들을 지금 다시 들어보면, 그들이 레퍼런스로 삼은 선배들이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현진영은 바비 브라운과 크리스 크로스를, 이현도는 뉴 잭 스윙의 아버지 테디 라일리를. “영어로” “현지 트렌드로” 억누르던 ‘케이팝 콤플렉스’ 얼결에 날려 이런 일이 댄스팝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발라드의 새 장을 열었다 평가되는 윤상만 해도 처음에는 일본 음악이나 제3세계 음악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고, 히사이시 조나 사카모토 류이치의 팬들은 윤상의 작품들을 고운 눈으로만 볼 순 없었다. 1990년대 초반 댄스팝과 발라드 장르를 새로 써내려간 젊은 선구자들이 초창기 모두 레퍼런스의 과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 레퍼런스들이 당시 그들이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최신의 트렌드였다는 것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시사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 가요계를 지배했던 강박이 다름 아닌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였다는 사실이다.
이승환
보아-김범수
1980년대에 대한 반동이 90년대 지배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 강박 2000년대엔 외국시장 공략
보아·동방신기 현지화 전략으로
미국문 두드렸지만 실패 2005년 나온 유튜브가 케이팝 확산
영미권 트렌드와 거리 먼 싸이
모든 강박관념 내려놓고도 어필 이 무렵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보아가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김범수가 자신의 영문 이니셜 비에스케이(BSK)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장에 싱글 앨범을 낸 것이다. 우연히 김범수의 ‘하루’를 들은 미국의 유명 아르앤비(R&B) 프로듀서 케그 존슨이 김범수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미국 현지의 한인 레이블 국도레코드가 동참하며 성사된 프로젝트였다. ‘하루’는 현지 색깔에 맞춰 편곡되어 ‘헬로 굿바이 헬로’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고, 국도레코드의 헌신적인 프로모션 끝에 빌보드 100 세일즈 차트에 51위까지 올랐다. 비록 편곡을 거치긴 했지만 한국 가요 특유의 ‘뽕기’를 완전히 지우진 못했던 ‘헬로 굿바이 헬로’ 한 곡만 세 가지 버전으로 담아낸 싱글 앨범으로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차트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가수가 빌보드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때는 다들 알지 못했다.
걸그룹 원더걸스.
슈퍼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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