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다큐 세상
요즘 과학 다큐멘터리를 준비중이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 그래도 나쁜 머리가 이 기회를 핑계로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지만 가끔 그 안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발견한다. 원자의 생김새가 그렇다. 우리 몸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니 호기심이 더해진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단다. 그런데 원자핵은 원자 가운데 있다는 걸 알지만 전자는 원자 안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눈금이 달린 자로 길이를 재듯 전자에 빛을 쏘아서 위치를 측정한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빛도 여러 종류여서 파장이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다. 파장이 짧은 빛은 눈금이 촘촘한 자와 같다. 더 정확히 잴 수 있다. 그런데 파장이 짧을수록 가진 힘도 더 세다. 빛을 쏘는 순간 그 힘에 전자는 튕겨 달아나버린다. 파장이 긴 빛은 눈금의 간격이 너무 크다. 아니 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집 위치를 물었는데 서울까지만 가르쳐주는 셈이다. 재려고 덤벼드니 도망가고 붙잡아놓자니 잴 수가 없다. 결국 내 몸 안의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폼나는 이름을 붙였다.
다큐 촬영 현장에 가면 불확정성의 원리를 체험할 수 있다. 조금 전까지 명랑하게 말 잘하던 사람이 카메라만 대면 얼어붙는다. 평상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카메라맨을 멀리 보내면 그제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수십미터 밖에서만 촬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카메라를 가져오면 얼음이다. 사실적 순간은 포착하려면 도망간다. 다큐는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는데 몇미터부터 그 경계가 시작되는지 아리송해진다.
영국 <비비시>(BBC) 다큐멘터리 ‘프로즌 플래닛’(사진)의 제작진도 심각하게 이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극지방의 자연을 담아낸 8부작 대형 다큐인데 그중 한 장면이 스캔들에 휘말렸다. 혹한의 북극 얼음 동굴에서 어미 곰이 새끼를 출산한 감동의 장면이었다. 알고 보니 북극이 아니라 네덜란드 동물원이었다는 것이다. 시청자를 속였다는 비난에 맞서, 실제 공간과 유사한 세트이고 출산 장면도 진짜라고 <비비시>는 항변했다. 자연 상태에서 찍었더라면 예민한 어미 곰이 새끼를 죽였거나 카메라맨을 해쳤을 거라고 덧붙인다. 듣다 보니 그도 그렇겠구나 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헷갈린다.
세트라는 가짜 장치를 도입해 사실적 진실에 접근하는 다큐도 있다. <트루맛쇼>라는 우리나라 인디 다큐멘터리다. 돈을 받고 평범한 식당을 스타의 단골집으로 둔갑시켜주는 지상파 맛집 프로그램을 고발하는 다큐다. 감독은 제작을 위해 경기도 일산에 직접 식당을 차렸다. 세트를 만든 셈이다. 여기에 맛집 프로그램을 연결시켜주는 브로커를 불러들인다. 식당 주인을 연기하는 피디의 추임새에 브로커는 천만원이면 방송에 나올 수 있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모두 털어놓는다. 감독은 픽션으로 논픽션을 구축한 셈이다.
대선 주자들이 바쁘다. 군복을 입고 전투식량을 먹기도 하고, 수십년 만에 총검술을 시연해 보이기도 한다. 평소에 못 보던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있자니 궁금해진다. 픽션인 줄 알면서 촬영하고 픽션인 줄 알면서 시청하는 우리는 서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저렇게 구축된 이미지는 원본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게 중요하기라도 한 것일까?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사진 <비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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