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다큐 세상
힌두교인들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수트라(경전의 가르침)를 행한다. 번뇌가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수트라를 따른다. 선을 좇으라든가 약한 자를 사랑하라는 식의 실천하기 애매모호한 경구가 아니다. ‘2초간 들숨을 쉬고 2초간 날숨 쉬기를 반복하라’처럼 구체적이다. 당장 해볼 수 있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잘만 쓰면 인생의 웬만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매뉴얼이 될 법하다. 문제는 이 수트라를 힌두교 성직자만 움켜쥐고 안 내놓는다는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다큐멘터리 제작도 회의에서 시작된다. 피디와 작가들, 조연출이 참가한다. 촬영이나 편집보다 회의가 중요할 수도 있다. 회의 때 설계를 잘못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프로그램은 산으로 올라간다. 죽 쒀서 개도 못 주고 땅바닥에 쏟는 꼴이다. 하루이틀 만에 회의를 끝내야 하는 다큐도 있고, 두세 달 걸리는 회의도 있다. 첫 회의 때는 대략 얼개를 잡는다. 방향이 정해지면 관련된 책을 읽고 전문가를 만난다. 보충한 정보를 모아놓고 아이디어를 내어 장면별로 구성한다. 전체 회의 기간 중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이다. 말 그대로 창의력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와 집단지성이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당연히 회의를 주재하는 피디의 능력이 결과를 좌지우지한다. 내 의견은 최대한 아끼고 다른 이의 의견을 독려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니 우리 회의는 미국 드라마에서나 봤음 직한 샤프하고 스마트한 아이디어만 왔다 갔다 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온갖 농담을 하다가 겨우 본론에 들어가나 싶은데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일쑤다. 이 무슨 허튼소리냐 싶어도 참는다. 농담은 내가 먼저 꺼냈기 때문이다. 나도 시간만 많으면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줄 수 있다. 그런데 촬영 스케줄을 생각하니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꽥 소리를 지른다. “그래서 뭐? 요점이 뭔데?”라든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는 식으로 면박을 준다. 아차 싶지만 늦었다. ‘꼰대’로 전락한다. 꼰대에겐 참혹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 입을 닫는다. 얼굴이 빨개진 당사자는 물론이고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동료 작가들도 침묵한다. 그러니 남은 시간에는 나 혼자 떠든다.
유명 광고를 많이 만든 기획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팀원을 절대 닦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아이디어에도 용기를 북돋워주고 격려한다고 한다. 회의를 위해 따로 준비도 시키지 말 것이며 회의시간도 칼같이 한 시간을 지키란다. 마감 날짜가 다가와도 쫓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다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독수리처럼 내리꽂아 낚아챈다고 한다. 신의 경지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변명부터 해댄다. 그쪽은 광고니까 가능한 거야. 찰나의 감정을 잡아내는 거잖아. 우리는 마라톤이야. 그것도 울트라마라톤. 그래봐야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미남도 아니고 나이도 많은데 유달리 젊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 있다. 비결을 물었더니 명답이 돌아왔다. 묻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 회의라고 다를까 싶었다. 명언을 가슴에 안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참고 참아 십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작가가 묻는다. “집안에 무슨 일 있어요?” 그래서 광고기획자 이야기도 하고 연예인 이야기도 했다. 까르르 오버 리액션이 나온다. 그러고는 곧장 어제 본 <응답하라 1997> 이야기를 꺼낸다. “그게 그렇게 좋으면 그쪽으로 가!”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두번 꼰대가 되기는 싫어 억지 미소로 화답한다.
이러니 수트라에 뭐가 담겨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분명히 회의 잘하는 방법, 회의 때 화 삭이는 방법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브라만들이 안 내놓는 것이다. 내친김에 힌두교로 개종해 그 비책을 모든 피디들에게 전수할까 싶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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