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진의 백스테이지
때때로 나는 스스로가 예능 피디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게 아닐까 걱정하곤 하는데, 까닭은 천성적으로 우유부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장르 연출자에게도 빠른 판단은 큰 장점이겠지만, 예능 피디의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두 장르인 리얼 버라이어티와 대형 음악쇼를 절대로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빠른 판단이 몹시 중요하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현장에서 한번 일어난 일을 놓치면 그걸 다시 주워담거나 재연할 수 없기 때문에, 또 대형 쇼는 대부분 생방송이기 때문에 종종 돌발적 판단을 강요당하게 된다. 뭔가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피디의 입을 쳐다보기 시작한다. “아, 생각 좀 해 보고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각을 좀 하는 사이에 상황은 끝나버린다. 좋게 끝나든 나쁘게 끝나든, 사건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빨간 ‘온 에어’(ON AIR) 램프가 들어오는 순간, 시간은 왕이 되고 무대 뒤의 모든 사람은 초침의 종이 된다.
생방송은 특이한 긴장감이 있다. 지금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 가닥 케이블을 타고 조정실로 들어갔다가 즉시 전국의 수십만대의 텔레비전에 비치게 된다. 생방송을 1년 넘게 하는 지금도 나는 믿기가 어렵다. 가끔은 ‘온 에어’ 불이 들어와 있는 카메라 앞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이러면 정말 내가 텔레비전에 나올까?’ 물론 나올 것이다. 15분 뒤에는 인터넷에 나오고, 며칠 뒤에는 회사를 나오게 되겠지만.
<뮤직뱅크>를 연출하는 한 선배는 첫 방송 전 너무 긴장을 해, 직전에 나온 뉴스 아나운서의 일기예보가 “잠시 후에 네 차례야. 실수하면 재밌겠지. 아유 신난다”로 들렸다고 했다. 난 정말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베스트 컷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연기를 반복해볼 수 있는 드라마나, 3년간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하고 몇 달 공들여 피사체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피디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나처럼 자동차를 살까 말까 4년을 고민하는 인간에게, “피디님, 지금 래퍼 마이크가 고장났는데 바꾸러 뛰어들어갈까요 말까요?” 같은 질문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가장 나쁜 결정은 “들어가세요”도 “아뇨, 그냥 갑시다”도 아니었다. 가장 나쁜 건, 그냥 20초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방송사고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생방송을 지배하는 왕, 시간이 내린 것이 된다.
나중에 책임을 지더라도, 뼈아프게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며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들어가세요” 혹은 “아뇨, 그냥 갑시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 인해 나는 위기를 잘 막아냈을 때의 행복감 혹은 실패했을 때의 교훈 중 하나를 얻게 된다. 시간이라는 패왕이 결정을 내리면, 나는 둘 중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누구의 삶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생방송이다. <뮤직뱅크>를 제작하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나마 우리 프로그램엔 큐시트가 있고 리허설이라도 있지만, 삶에는 그런 것도 없는 게 아닌가. 인생은 실수했다고 다시 찍지도 못하고 다음 준비가 덜 됐다고 잠시 멈춰 놓고 생각할 수도 없다. 생각이라는 걸 하는 동안 몸은 낡아가고, 아이는 사정없이 자라나고, 부모님은 나이 드시고 , 소중한 사람을 놓친다.
“아, 아까 거기부터 다시 한번 더 갈게요”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 된다. 인생은 긴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끝나는 생방송 같은 거니까.
류호진 한국방송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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