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민용근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 ‘팬심’으로 가득 찬 열혈관객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영화와 만날 때가 있다. 오래 전, 별 생각 없이 보다 마음이 온통 흔들려버렸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조제)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 어떤 걸그룹 앞에서도 휴대폰 카메라조차 꺼내지 않는 내가,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이케와키 지즈루의 한국 방문 때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영화에 대한 ‘순수한’ 팬심 때문이었다. 며칠 전 영화를 연출한 이누도 잇신 감독이 방한해 마스터 클래스(초청 강연)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참석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조제>는 하반신 장애가 있는 조제(이케와키 지즈루 분)와, 그녀를 사랑했던 그러나 결국 떠날 수밖에 없던 쓰네오(쓰마부키 사토시 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배우 이케와키 지즈루의 매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찾다가 <조제>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일화로 시작해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괴물 영화와 소녀 만화를 동시에 좋아했던 감독의 어린 시절, ‘괴물의 집에 평범한 사람이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조제>의 모태가 된 이야기 얼개, 조제와 쓰네오가 나눴던 키스 장면에서 건넸던 연기 주문 (“첫 번째 키스는 두 사람이 충돌하듯이, 두 번째 키스는 자전거를 처음 탄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해 주세요”) 등을, 해당 영화 장면과 함께 세심히 설명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에피소드 였다.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쓰네오가 조제를 버리고 옛 연인에게 돌아간다는 내용의 결말을 영화사에 보여줬을 때 모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특히, 혼자 남겨진 조제가 외롭게 생선 한 토막을 굽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도 비관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그들이 이 장면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활자화된 시나리오의 한계 때문일 뿐, 자신이 떠올린 영화의 이미지는 오히려 ‘희망’에 가까웠다고 했다. 또한 그 의미 전달만큼이나 중요한 건, ‘희망’을 보여주는 방식 혹은 그 뉘앙스에 있다고 했다.
감독은 비관적으로 느껴질 법한 시나리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조제의 ‘휠체어’를 좀 더 스피디한 ‘전동 휠체어’로 바꿨고, 조제의 뒷머리를 질끈 묶어 외모의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조제가 불판 위에 굽고 있던 작은 생선 한 토막이었다. 홀로 남겨진 조제가 굽고 있는 그 생선 한 토막이 ‘아주 맛있게’ 구워지고 있어야만, 조제의 삶에 대한 의지와 꿋꿋함이 전달된다고 감독은 믿었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 짧은 이미지를 통해 (시나리오와 정반대의 느낌을 가진) ‘희망’이라는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려는 감독의 과감함이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론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던 영화 속 생선을 보며 침을 삼키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무심한 듯, 예전과 달라진 표정으로 조용히 생선을 굽던 조제의 성숙해진 눈빛과, 불판 위에 익어가고 있던 노릿한 생선 한 토막. 어쩌면 현실에서 ‘희망’이란 그런 모습을 띄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삶의 희로애락이 온통 뒤섞인 가운데 언뜻 스쳐가는 짧은 한 줄기 빛. <조제>가 오래도록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가진 영화일 수 있는 건, 그 미묘한 희망의 뉘앙스를 포착해낸 감독의 섬세함 때문이 아닐까.
영화감독 민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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