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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탐욕스런 자본의 그늘 비춘 ‘최후의 제국’

등록 2012-11-23 19:28

<에스비에스>(SBS)의 <최후의 제국>
<에스비에스>(SBS)의 <최후의 제국>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사실은 느리고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누워, <개그콘서트>(개콘)를 보며 같이 사는 개·고양이와 뒹굴었다. 포근한 밤을 보내며 다음주를 살 기운을 얻는 중이었다. <개콘>이 끝나고 여전히 빈둥대며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다큐멘터리의 화면은 화려한 돈의 제국, 미국의 번화가를 담고 있었다. 번쩍이는 광고판, 꺼질 것 같지 않은 건물의 조명, 그 사이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시엔엔>(CNN)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론 폴 미국 텍사스주 하원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병이 나서 치료비가 비싸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론 폴 의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자유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 방청객들은 환호하며 박수쳤다.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그럼 돈 없고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나요?” 론 폴 의원이 머뭇거리자 방청객들이 대신 “네!”라고 소리쳤다.

하나의 지구에 전혀 다른 두개의 세계가 굴러가고 있었다. 플로리다 올랜도 129번 도로변 모텔촌엔 보증금 낼 돈이 없어 집을 잃은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언제나 일하지만 언제나 가난하다. 모텔촌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음식 나눠주는 자원단체 차가 오는 날이다. 음식의 유통기한은 단 하루. 폐기처분 직전에 놓였던 음식들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주어진다. 돈이 없는 부모들은 아이를 먹이지 못하는 대신 가난한 음식 박스를 나눠 들어줬다. 지구 반대편 중국의 부호도 자신의 아이를 먹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비싼 값을 치러 능숙한 유모를 구하고, 젖을 먹일 수 있는 대리 수유모를 구했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어느 고등학교의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 전부입니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 그 교장은 아이들에게 돈을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 학교 아이들은 출석하고 과제를 해오면 돈을 받는다. ‘성과급’이 지급되고 출석률이 15% 올랐단다. 돈이 낳은 또 하나의 기이한 현실이다.

제작진은 진절머리 나는 ‘돈지옥’을 떠나 태평양 가운데 있는 섬 아누타를 찾았다. 13일 동안 조각배를 타고 별을 보며 찾아가야 했던, 세상과 단절된 작은 섬이다. 아이들은 벌거벗은 채 뛰어놀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래 부르고 화음을 만들고 깔깔대며 웃었다.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곳, 어쩌면 태초의 세계와 더 가까운 마을이었다. 제작진은 부자도 빈자도 없는 마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인터뷰를 한 24살의 모펫 파이타카는 이웃과 어깨를 겯고 살아내는 와중에 평화와 행복이 싹튼다는 진리를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이만큼 달려온 세상에 사는 내 눈에 너무 다른 삶의 아누타섬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내가 만약 그곳에 떨어진다면, 아누타 주민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매일 밤낮을 헤아리며 커다란 배에 구조되길 바라지 않을까. 돈냄새가 골목마다 스며든 세계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나는 이 돈지옥에서 그나마 고통받지 않고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악마가 들끓던 그 밤 보았던 다큐멘터리는 <에스비에스>(SBS)의 <최후의 제국>이다. 11월18일 1부 <프롤로그-최후의 경고>에서 시작해 <슬픈 제국의 추장>, <돈과 꽃>, <공존, 생존을 위한 선택> 등 총 4부작이 이어질 예정이다. 돈에 모든 가치를 거는 이 시대가 불쌍했다. 화면에 실린, 노역하듯 삶을 이어가는 99%의 친구들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난의 벼랑으로 떨어진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중산층이었다. 오늘과 같은 평화로운 주말 밤을 잃는 건 아닐까. 제작진이 제시하는 대안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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