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적자>
[토요판] 김민경의 요리조리 TV
“당분간 뉴스 안 봐!”
12월19일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한 대학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티브이 켤 힘도 없다”며 거들었다. 대선 직후 사흘간 집에만 있었다는 또다른 선배는 한술 더 떴다. “예능 프로그램 방영 시간인데도 채널 돌리기조차 싫어서 홈쇼핑만 봤어.” 다들 허탈한 웃음으로 공감을 나타냈다. 지난 1년을 올인한 ‘빅 이벤트-18대 대선’이 끝나자 내 주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선 후유증을 앓았다.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저마다 달랐지만, 처방은 비슷했다. 현·실·도·피.
대학 때는 티브이 볼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가끔 티브이를 볼 때는 꼭 사회성 짙은 드라마·영화만 골라 봤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며 펑펑 울고 난 뒤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현실이 이렇게 팍팍한데 여가시간마저 심각하면 못 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언론사 입사와 함께 ‘남 비판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 그런 마음을 굳혔다. ‘바보상자’에서라도 힐링을 찾고 싶었다.
올해 유행한 주요 드라마가 ‘시간여행’을 주요 장치로 활용한 사실을 떠올리면 사람 마음은 거기서 거기 아닐까 싶다. 대개 방송사의 기대만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옥탑방 왕세자>, <닥터 진>, <인현왕후의 남자>, <신의>까지 비슷한 유형의 작품이 쏟아졌다. 나는 이런 타임슬립(시간이동)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 시간여행을 통해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잠시나마 현실의 팍팍함을 잊게 해줬다. 여기에 보너스~! ‘시간’이란 절대장벽이 가로막는 로맨스는 초월적 사랑에 대한 판타지도 채워줬다.
아무래도 타임슬립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던 걸까. 좀더 현실적인 시간여행, <티브이엔>(tvN) <응답하라 1997>이 내게로 왔다. 친구들과 이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어느덧 주인공이 아니라 1990년대를 말하곤 했다. 결론은 항상 “그때가 좋았지…”였다. 집이나 빚이나 회사가 아니라 친구가, 사랑이 전부였던 우리들의 10대. 돌아갈 순 없지만, 추억이라도 해야지. 한번도 꿈꿔본 적 없던 미래를 사는 나는, 현실의 허탈함을 ‘과거’로부터 채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시절이 주는 위로, 내가 티브이에서 ‘힐링’을 찾는 이유였다.
자꾸만 외면하고자 했던 현실을 티브이에서 맞닥뜨리게 한 것은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추적자>였다. 부패한 재벌·정치·검찰 권력과 그에 맞서 싸우는 한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의 데칼코마니였다. 현실보다 더 잔인한 현실에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껐고,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켰다. 나는 그게 거짓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달콤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기에 전자 쪽에 쏠렸다. 하지만 주위의 드라마 ‘실시간 중계’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은 백지 한장 차이였을까. 시청률 40%를 넘긴 대박 드라마들을 제치고 <추적자>를 최고의 드라마로 꼽는 사람이 내 주변에는 많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주인공 손현주씨는 얼마 전 ‘케이(K) 드라마 스타 어워즈’ 대상도 받았다. <에스비에스> 연기대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대선이 끝나고, 뉴스를 봐야 한다는 직업적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 <무한도전>만 보며 낄낄 웃었다. 그런데 거기서 또 <추적자>처럼 현실보다 더한 현실을 만나면 그땐 어쩌지?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드라마를 중심으로 티브이 콘텐츠를 요리조리 뜯어볼 ‘김민경의 요리조리 티브이’를 이번주부터 격주로 싣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