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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발 편집’의 공포

등록 2013-01-31 20:03수정 2013-01-31 21:08

류호진의 백스테이지
지난 연말부터 새 프로그램이나 특집 프로그램을 전전하며 ‘날품팔이’를 했다. 날품팔이라 함은 한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배치되지 못하고 기존 팀에 끼어서 촬영이나 편집을 거들어주는 종류의 일을 말한다. 물론 다 지났으니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날품팔이로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편집의 완성도와 자막의 신선함이다. 물론 고정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경우에도 편집과 자막은 기획 업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특히 10년차 이하 조연출들에게 이 두 가지 작업은 회사 생활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부분이다. 요즘 시청자들은 눈이 높아져서 ‘편집을 발로 했다’(편집을 어떻게 발로 하나? 발가락용 마우스도 없는데)든가 ‘없느니만 못한 자막’이라는 혹평을 서슴없이 내놓는다. 자기 손으로 편집한 피디들이 그런 평을 들으면 ‘멘탈’이 날림공사 뒤의 물막이 보처럼 쩍쩍 갈라질 수밖에 없다.

피디들의 스트레스는 전체 작가들과 연출진이 모여 편집본을 점검하는 ‘가편 시사’를 앞두고 최고조에 이른다. 분명 웃고 떠드는 프로그램을 보러 모였는데 모두의 얼굴에서 일말의 평화도 느낄 수 없는 시간이다. 막내 피디는 메인 작가의 매서운 눈빛부터 막내 작가의 하품까지 온갖 미세한 정서적 반응을 지진계처럼 예민하게 모니터한다.

가죽이 홀라당 벗겨지듯 부끄러운 시간이 한동안 지난 뒤 메인 피디의 입에서 “이게 끝이었나?”라는 말이 나온다든가, 메인 작가한테서 “이렇게 가니까 느낌이 안 사는데”라는 반응이라도 나왔다간 그날 잠은 다 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주변 동료들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1주일 주기의 규칙적 조울증이 엿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남에게 보여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데 좋은 방법이다. 어디 한적한 시골길의 도로 연석을 깔 때도 ‘아, 이거 누가 보고 뭐라 그러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최소한 100만명이 쳐다볼 일을 대충 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능력이 없어서 못할지는 몰라도 대놓고 이런 일을 대충 하는 사람은 없다. 이틀간 잠을 못 잤어도, 오전에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어도 마무리가 안 된 결과물을 방송으로 내지는 못한다. 신체의 고통은 개인적인 것인 반면에 결과물의 허술함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 일에는 사실상 타협이 불가능하다.

물론 자초한 고통이다. 방송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무언가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재미를, 어떤 생각을 공유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방송사에 입사한다. 그러고 나서는 곧 ‘제발 오늘은 시사를 안 했으면, 다음달에 혹시 결방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방송국 직원은 예술가보다는 노동자라고 믿게 됐다. 방송국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들어와서 몇 달 만에 노동자로 교화되는 놀라운 교정기관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결과물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칭찬받고 싶어서,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체질이 있다. 피디들이란 결국 시사 중에 ‘빵’ 하고 터지는 작가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면 며칠 못 자 쌓인 피로가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안타까운 ‘애정 결핍’ 노동자들인 것이다.

류호진 한국방송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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