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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다큐엔 ‘시인의 눈’이 필요하다

등록 2013-02-14 19:48

김형준의 다큐 세상
오래된 일이다. 방송 작가들이 모이는 송년회 자리였다. 유쾌한 분위기에 휩싸인 후배가 번쩍 손을 들고 썰렁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선배님들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름만 듣던 대작가들을 직접 만난 터라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와 예능 작가의 순서를 돌아 다큐멘터리를 쓰는 작가가 답할 차례가 됐다. 다큐를 지망하는 막내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다큐멘터리를 쓰고 싶다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시를 많이 읽으세요.” 김빠지는 답이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영화를 보고 시를 읽으라니. 뭔가 더 그럴싸한 답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은 잊지 않았겠지만 후배의 속은 삐뚤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영화는 열심히 볼 터였다. 하지만 시는 달랐다. 모호하고 흐릿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몇 번을 읽어도 울렁증만 더해진다. 바쁜 세상에 대놓고 말할 시간도 없는데 왜 빙빙 돌리는지 울화가 벌컥 올라온다. 후배는 시집을 내던지고 노트북을 열고 미드(미국 드라마)를 켠다.

이 어린 다큐 작가를 위해 일찍이 설봉존자가 한 말이 있다. 설봉존자라고 하니 무슨 미아리 점쟁이 이름 같지만 그는 중국 선가의 유명한 선생이다. 그가 한 비유는 이렇다. 눈 오는 날 사냥꾼이 발자국을 쫓는다. 영양이다. 뿔이 앞으로 휘어진 놈이다. 제까짓 게 도망가봐야 헛수고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어찌할 것인가 싶었는데 그 발자국이 뚝 끊겨 있다. 갸우뚱거리는 사냥꾼의 머리 위에 영양이 있다. 영양은 나뭇가지에 뿔을 건 채 매달려 잠을 자고 있다. 설봉존자는 시를 쓸 때 사라진 영양처럼 쓰라고 가르친다. 시인이 보여줄 것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후배는 곰곰이 생각했다. 시인이 일부러 독자를 어지럽게 만들려고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혹 세상 만물이 뿔을 건 영양처럼 좀처럼 실체를 감추기 때문은 아닐까? 어차피 무슨 사물이든 사전에 나오는 한두 줄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의자란 무엇인가? 후배는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다.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라고 나와 있다. 얼추 맞는 말 같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닌 듯싶었다. 사람 대신 고양이가 올라가면 어떻게 되나? 앉는 대신 누워 다리를 올리면 의자가 아닌가? 바위에 걸터앉으면 바위가 의자가 되던가? 따지고 들다 보니 후배는 원래 의자가 무엇이었던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시인이 필요하다. 시인은 사물을 사전의 말투로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은유를 쓰고 상징을 한다. 그러니 시가 어렵다.

이제 그 후배는 다큐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전처럼 까놓고 말하다가는 실패한다. 그저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숨은 의미는 시청자가 찾아야 한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시인의 눈이 필요하다. 선배 작가가 말한 것은 그런 훈련일 것이다. 후배는 그제야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시를 쓰듯 다큐를 만들다 보면 언유진이의무궁(모름지기 말은 끝나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한다)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다큐멘터리도 방송은 끝나지만 그 뜻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수 있다는 뜻이리라. 이제는 연차가 제법 된 그 후배 작가에게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정민 교수가 쓴 <한시미학산책>이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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