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스페셜 연작시리즈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1989년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기억하는 교실 풍경은 복도 쪽 창가에 다닥다닥 매달린 엄마들의 얼굴에서 출발한다. 제 아이가 자리에 잘 앉았는지, 수업은 잘 듣는지 지켜보던 한 무리의 엄마들은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 들어와 아이들 대신 청소를 해줬다. 엄마들은 이왕에 학부모라면 소위 ‘치맛바람’ 좀 펄럭여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게 얼굴을 익힌 엄마들은 모임도 만들고, 선생님 모셔다 식사도 하고, 잘나간다는 학원 정보도 공유하는 등 이런저런 활동을 했더랬다.
2013년, 1980~90년대 ‘헬리콥터 맘’의 딸들이 이제 엄마가 되었고 시절이 변한 만큼 아이들을 ‘돌리는’ 방식도 진화했다. <한국방송>(KBS) 드라마스페셜 연작시리즈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는 강남의 명문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네 엄마의 일상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푼 4부작 드라마다.
“남편의 재력과 아이들의 성적에 의해 자신의 존재감이 결정되는 엄마들”이 있다. 이들이 자신의 서열을 확인하고 때로는 뭉치고 어쩔 때는 편가르기를 하는 암묵의 전쟁터는 다름 아닌 아이들의 유치원이다. 서울 강남의 1% 아이들만 상대한다는 하나유치원, 원비는 200만원이다. 전직 워킹맘이었던 예린이 엄마 수아(송선미)가 원비 내역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니 원장은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고 싶다면 이 정도는 투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수아는 아파트 근처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다가 일에 쫓겨 깜빡하고 재원 신청서를 제때 못 내는 바람에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하나유치원에 입성시켰다. 하나유치원의 아이들은 영어는 기본, 중국어와 스페인어는 선택이다. 유치원 통원버스 대신 엄마가 데려다주는 차를 타고 등원한 아이들은 유치원이 파하면 다시 그 차를 타고 강남 일대의 학원과 엄마들끼리 알음알음 짠 그룹 교습을 떠돈다.
지난 17일 방영한 1부는 대학 졸업 후 10년 넘게 직장만 다녔던 수아가 ‘이상한 나라’에 진입하게 된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의 대화도 이상하다. 해바라기반에서 가장 부자인 도훈의 집에 모여서 놀던 중에 리나가 자기 집에서도 파티를 열겠다고 얘기했다. 예린이가 자기도 초대해 달라고 하니 리나가 되묻는다. “글쎄, 근데 너넨 몇 평이야?” 전에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는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해본 적 없는 예린이는 집의 평수를 가늠할 수 없다. “몇 평…? 그게, 100평…?” “100평? 뻥치시네. 야, 우리집이 60평이거든. 너희 집, 우리집보다 더 넓어?” “아니, 그건….” “몇 평인지 몰라? 너희 집 어딘데?” “행복아파트.” “행복아파트? 야, 거기가 무슨 100평이냐. 완전 구린 아파트인데. 순 거짓말쟁이.” 하지만 이 세계에서도 이제 리나의 이런 질문은 ‘구리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진이 “그런 것 물어보는 것 실례”라고 조언하고, 리나네보다 넓고, 아줌마도 1명 더 있는 도훈은 “그럼 니네 집은 부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리나의 악다구니는 과연 7살의 정서라 할 수 있을까. “우리집 부자 맞아, 왜 그래. 우리집 타워캐슬이고 우리 아빠 차는 벤츠에 우리 엄마 차는 1억이 넘거든.”
아이가 아이답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한 아이들과 친구가 되길 바라는 수아는 끊임없이 헷갈린다. 학부모들이 돈을 갹출해 담임에게 명품백을 사준다거나, 재력으로 군림하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하는 일이 어이없다 생각하면서도 엄마들을 만났을 때는 그 세계에서 불문율이 된 논리를 곧이곧대로 따라가려고 애쓴다. 예린이 또한 자기 장난감이, 부모의 자동차가 얼마짜리인지 시시콜콜 자랑하는 이 세계가 어리둥절하지만 힘센 친구의 집에 초대받고 싶어 거짓말을 한다. 수아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천진했던 아이가 의기소침하거나 우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우리는 알겠는데, 엄마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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