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런 친구들이 있다. 별나고, 웃음소리가 크고, 친구들의 별명을 도맡아 짓고, 같은 반 아이들 가운데 부자연스러운 특징을 지닌 아이들을 잡아내 흉내 내고, 유행을 선도하는 친구들. 이런 아이들이 장차 적성을 살리면 좋은 엠시(MC), 예능 피디(PD), 예능 작가가 된다. ‘예능업계’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반에서 우스꽝스러운 아이들을 놀려먹고, 예쁘고 멋진 아이들을 우상화하고, 그러다 그런 아이들이 허점을 보이면 골탕을 먹이기도 하는 일의 연속이다.
따라서 아직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지 않은 분이라면 학창 시절을 돌아봐도 좋을 것이다. 골탕을 먹이는 쪽이었는지, 먹는 쪽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는지를 말이다. 그런 헛소동의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면 적어도 예능 계통 업무는 극심한 따분함과 죄의식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예전부터 유쾌한 웃음을 주는 전설적 프로그램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떠들고 놀리고 망가지는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정해져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런 것을 즐거워했던 아이들의 수가 한정됐던 것과 같다. 결국 상당수 시청자들은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 쓸데없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얘기 왜 보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의 예능은 바로 이 지적을 피하기 위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한다. 주춤거리는 예능 시장의 크기를 더 키우려면 ‘헛소동’에 아무 흥미가 없는 시청자들을 더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진정성’이나 ‘리얼’, ‘힐링’ 같은 말이 동원되는 것은 결국 “저 쓸데없는 짓 왜 보고 있냐”는 말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한 말잔치, 단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려고 설정한 기괴한 장치나 게임 같은 것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그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이 정체된 시장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느니 점잖고 예민한 사람들을 새롭게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이는 게 나았던 것이다.
점잖은 시청자들은 대책 없는 조롱에 함부로 반응하지 않는다. 웃기는커녕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여기서 예능을 제작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시청자들의 불통이 발생한다. 예능국 사람들은 서로를 웃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석에서라면 비만과 무식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혼과 지인의 죽음도 웃음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청자들은 그런 독한 농담보다는 ‘호감’을 원한다. 호감은 마술 같은 힘을 갖고 있어서 별로 안 웃긴 농담도 호감 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큰 웃음을 만들어낸다. 엠시들끼리의 조롱과 자학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일곱살 아이들의 천진한 말실수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예리한 엠시가 슈퍼스타와 기싸움을 벌이는 과정보다 대스타가 스스로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것이 훨씬 더 큰 웃음을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내려놓고 망가뜨렸을 때, 시청자들은 ‘저 사람 바보구나’가 아니라 ‘저 사람 쿨하구나’라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변화했다.
‘선 호감 후 웃음’의 시대다. 웃겨서 사랑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랑받으니까 쉽게 웃기는 시대가 됐다. 이러다 보니 독한 웃음에 훈련된 예능국 사람들은 갑자기 ‘웃기면서도 선량해져야 하는’ 패러독스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류호진 한국방송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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