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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다큐멘터리, 기록과 개입 사이

등록 2013-03-07 19:54

사진 출처: 비비시
사진 출처: 비비시
김형준의 다큐 세상
필 애글런드는 카메룬을 다시 찾았다. 25년 만이었다. 카메룬은 그에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땅이다. 1986년 애글런드는 열대우림에 사는 바카족을 찍었다. 바카족은 피그미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50㎝가 되지 않는 작은 사람들이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사냥에도 능숙했다. 밀림을 누비며 활로 먹잇감을 척척 쓰러뜨렸다. 생활에 쓰이는 모든 것은 숲에서 얻는다. 나뭇잎을 엮어 집을 만들고 동물 가죽으로 옷을 두른다. 바카족의 위대한 전사 니카노는 음악을 사랑했다. 악사가 현을 튕기고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 니카노는 박자에 맞춰 자신의 무용담을 노래했다. 노랫말에는 고릴라와 코끼리, 오소리가 등장한다. 아들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니카노에게서 사냥 기술을 배웠다. 사냥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애글런드는 니카노의 일상을 담아 다큐를 만들었고 이듬해 영국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바프타(BAFTA) 상을 수상했다.

초로에 접어든애글런드는 바카족을 다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아쉽게도 니카노는 죽고 없었다. 대신 막내아들 알리가 장성해 있었다. 그러나 알리의 바카족은 아버지의 바카족과 달랐다. 이제 그들은 사냥을 하지 않는다. 벌목회사 인부로 일한다. 자신들의 터전인 숲을 없애는 공사에 불려나간다. 회사는 급료 대신 술을 준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술에 중독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형아들이 태어났다. 알리의 딸도 다리를 절뚝거린다. 술에 취해 다투는 소리가 종일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다시 그들을 만난 다큐 감독에게 현실은 참담했다. 취해서 휘청거리는 바카족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애글런드는 고민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스트의 위치를 넘어 이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순수한 기록자로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만이 옳은지.

애글런드는 절묘한 선택을 했다. 마을 마당에 영사기를 설치하고 필름을 돌렸다. 25년 전 다큐였다. 사람들은 오래전 자신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는 게 신기했다. 개미를 먹는 꼬마를 향해 “저건 나야”라고 외치는 청년을 보고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한때 사냥감이자 친구였던 동물들이 등장하면 숨을 죽였다. 노래하는 전사 니카노도 나왔다. 그는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어떻게 침팬지를 사냥했는지 아이들에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고, 어떤 이는 침울해졌다. 알리는 아버지 얼굴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다음날 아침 알리는 바카족의 전설로 내려오는 땅 ‘코끼리 거울’을 찾기로 결심한다. 맑은 샘물이 흐르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생명의 땅,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아버지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불편한 딸도 둘러업었다. 아버지가 그랬듯 알리도 딸에게 바카족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다큐멘터리스트는 그들의 여정을 쫓는다.

다큐 제목은 <바카족의 절규>다. <비비시>(BBC)에서 지난해에 만들었다. <한국방송>(KBS)의 <세상의 모든 다큐>로 국내에도 방송됐다. 동료 몇몇이 함께 봤다. 어느 피디는 피사체의 상황에 개입한 감독의 선택을 비판했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피디는 다큐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다큐의 목표는 세상의 변화이지 기록 자체가 아니라며 감독 편을 든다. 애글런드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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