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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봄의 전령사’ 15초 광고

등록 2013-03-28 19:51수정 2013-03-28 21:32

류호진의 백스테이지
사람들은 꽃을 보고 봄이 온 것을 아는 걸까. 바람의 감촉이 포근해진 것을 느끼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아는 걸까. 계절을 느끼는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종종 최종 편집을 하다 우리 프로그램 앞뒤에 붙는 광고를 보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동료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제때 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고, 편집실이나 스튜디오처럼 밖이 잘 안 보이는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놓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광고 시간은 그래서 피디들에게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주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광고를 붙이는 시간을 아주 좋아한다.

매주 달라지는 광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광고업계도 자기네들 달력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 세일 광고와 스키장 광고, 근사한 커피 광고들은 11월 말부터 우르르 나타나 괜히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눈 내린 풍경과 재즈풍 음악에 실린 부드러운 남자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괜스레 갈 수도 없는 겨울 여행 같은 것을 떠올리다, 본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퍼뜩 정신을 차리기도 한다.

1월을 지나 2월이 되고 비슷한 광고들이 슬슬 지겹다고 느껴질 무렵, 무심코 넣은 광고 테이프가 갑자기 전혀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날이 온다. 산등성이 강가에 꽃이 터지듯, 모든 회사들이 약속한 듯이 새 광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모델의 옷이 얇아지고, 화면이 파스텔 톤으로 변한다. 배경음악이 경쾌한 팝으로 바뀐다.

고어텍스 방한복 광고가 메시 소재의 워킹화 광고로 바뀌고, 핫초콜릿 광고가 청량음료 광고로 바뀐다. 그러면 정년을 앞둔 편집감독은 “아아~ 봄이네, 또” 하고 한숨 같은 탄성을 낸다. 이에 새까만 후배도 “올해는 어디 안 다녀오시나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건 회사 정원에서 꽃을 보며 해야 하는 대화 같은데…. 그래서 광고가 방송의 꽃이라고 하는 건가.

3월 초, 6월 초, 9월 초, 11월 초에 한 번씩 이런 날이 찾아온다. 이런 날은 광고국에서 보내 온 시엠(CM) 목록 앞에 ‘신규’라는 기호가 빠짐없이 붙는다. 이런 걸 보면, 새 학기 담임 선생님이 된 기분이랄까, 올망졸망 프로그램 앞에 붙게 될 새 광고들이 다 반갑다. 물론 광고는 우리에게 돈을 주는 밥줄이기도 하지만.

채널이 많아지고 ‘다시 보기’가 일반화되면서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점점 광고를 피하다 보니, 요즘은 전통적 시엠보다 프로그램 안에 들어오는 간접광고나 유튜브 전용 동영상이 광고업계의 주요 관심사라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면 구성 내용 속에 자사 제품을 노출시키려는 기업들의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도 실감케 된다. 아주 길게 보면, 결국 방송사와 기업 서로의 욕구에 의해 광고는 프로그램처럼 변하고 프로그램은 광고처럼 변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하지만 15초,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노력과 돈을 투자하는 장르, 그리고 그렇게 계절과 생활, 일상에 민감한 장르도 광고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뭐가 어찌됐든 텔레비전 광고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친 편집실을 좀 더 활기차게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광고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유쾌함을 그렇게 나쁘게 보고 싶지는 않다.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를 믿는 이 시대에 광고를 즐기는 것-장인들이 세공한 이미지를 즐기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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