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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혼자만 말하는 다큐의 ‘불통’

등록 2013-05-02 19:43

김형준의 다큐 세상
어느 젊은이가 스코틀랜드 산골을 여행하다 선술집을 발견했다. 아담하면서 고풍스러운 술집이었다. 손님은 노인 한 명뿐이었다. 맥주를 홀짝거리던 노인이 갑자기 젊은이를 향해 돌아앉았다. “젊은 양반, 이 술집을 누가 지었는지 아나? 바로 나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좋은 나무만 골라 맨손으로 만들었지. 내 아들을 키울 때보다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어.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위대한 술집 건축가 맥그리거라고 부를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어.” 노인은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돌담 보이지? 내가 쌓았어. 비바람 뚫고 돌을 하나하나 옮겨 만들었지. 사람들은 나를 돌담 건축가라고 부를까? 아니야.” 젊은이는 대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했다. “돌담 너머 호수 보이지? 그 둑도 내가 만들었어. 얼음보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판자 하나하나를 말뚝으로 박았지. 그래서 둑을 세운 장인으로 나를 부르는 줄 아나? 전혀 아니지.”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른다. “이건 가정인데 말이지, 내가 염소와 잤다면 어떻게 될 거 같나?”

미국 영화 제작자 앤드루 스탠턴이 스토리텔링에 대해 강의하면서 예로 든 에피소드다.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는가? 어떤 이야기에 꾸벅꾸벅 졸고 어떤 이야기에 번쩍 눈을 뜨나? 어떻게 해야 내 이야기에 주목할까? <토이 스토리>·<벅스 라이프>를 만든 이 제작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는 법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신화도 이야기의 한 형태라면 이야기야말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유산이다. 그런데 근래에 새삼 스토리텔링이 주목받는다. 영화와 드라마는 본래의 숙명이니 당연하다 하더라도 기업까지 스토리에 주목하는 것은 뜻밖이다. 스토리를 담은 경영 전략을 만들고, 그 전략을 텔링(말)하는 광고에 담는다. 소비자와 소통하는 가장 좋은 도구가 스토리라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단순한 이미지보다 스토리의 잔상이 오래 남고, 그래서 상품에 대한 이해와 설득에 더 효과적이다. 물론 모두 성공하지는 못한다. 어느 화장품 회사 광고는 소비자 반응을 예상하지 못해 된서리를 맞았다. 광고의 여주인공은 명품 가방을 갖고 싶다. 돈은 적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친구와 만나는 횟수를 줄이는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화장품의 여러 기능을 하나로 모은 자사 화장품 성능을 비유적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물질적 도구로만 본다는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역효과가 났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생명보험 광고도 있었다. 남편은 죽었지만 남편이 든 생명보험이 아내와 아이를 지켜준다는 광고였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삼아 남편이 없는 일상을 담담히 그렸지만, 문제는 멀리서 그 아내를 지켜보는 보험설계사였다. 내가 죽고 없는 자리에 잘생긴 젊은이가 있는 그림은 유쾌할 수 없다. 보험의 목적에 충실한 이야기인데 소비자는 왜 불편해할까? 위트 있게 화장품 기능을 보여주었는데 왜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화자와 청자의 소통이 문제다.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듣는 사람과 교통하는 이야기는 부족하다. 주고받지 않고 전하기만 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강요에 불과하다.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우리의 다큐멘터리는 어떠한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가. 듣는 이한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 고민해 볼 지점이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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