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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할배! 다음엔 또 어디 가?

등록 2013-07-26 19:37

<꽃보다 할배>(tvN)
<꽃보다 할배>(tvN)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각자 가방에 소주 2병씩. 플라스틱병에 든 걸로. 안주는 적당히 알아서.” 언젠가 가족여행을 갈 때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미션을 전달했다. 어디 갈 때면 하나는 꼭 빠뜨리는 나에게 여권 챙겨라, 공항에 늦지 않게 도착하라는 말 대신 아버지는 소주를 신신당부했다. <꽃보다 할배>(tvN)에서 플라스틱 소주병이 차곡차곡 쌓인 신구의 여행가방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떠올렸다. “우리의 양식이거든”이라고 말하며 남은 소주를 생수병에 소중하게 붓는 백일섭의 모습에서는 “이렇게 들고 다니면 물인 줄 알 거야”라고 말하며 호텔방에서 플라스틱 소주병의 라벨을 떼던 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7월5일 첫 방송을 한 <꽃보다 할배>는 방송 시작 전부터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1박2일>의 나영석 피디(PD), 이우정 작가가 새로 기획한 여행 버라이어티라는 점, 등장인물이 평균 연령 76살 카리스마 짱짱한 노배우들이라는 점 등이 주목을 받으며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공개된 영상은 익숙하고도 새로웠다.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아빠 어디 가>, <맨발의 친구들> 등 여행 떠나는 예능에 친밀한 시청자들은 낯선 곳으로 떠나며 벌어지는 소란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엔 더는 ‘까나리액젓’ 벌칙이나 출연자의 자는 모습까지 담는 밀착 카메라가 없다. 젊은 연기자들이 의욕적으로 야외 취침을 하는 등 몸을 불사르는 것이 <1박2일>식 여행 버라이어티였다면 ‘할배’들에게 ‘나는 소중하다’. 제작진이 사전 모임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제안하자 이순재는 “그건 관을 2~3개 가지고 가든가”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숙소에 도착한 백일섭은 침대 옆에 비치된 카메라를 보고 “잠은 편히 자자. 자다가 발로 걷어차 버릴 거야”라고 역정 섞인 농담을 하며 카메라를 치우라고 말한다.

전무후무한 캐릭터들도 재미있다. 에이치포(H4)의 리더 이순재는 최고령자(80)이지만 가장 의욕적이다. 여행단의 선봉에 서서 전진하는 ‘직진순재’다. 둘째 신구는 의외로 다정하고 심지어 미소 천사! 별명은 다른 할배들이 ‘구야 형’이라 불러 ‘구야 할배’다.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 전문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조절하고 등을 다독이는 셋째 박근형은 멀리 있는 아내에게 다감한 ‘로맨티스트’다. 70살인데 형들한테 자꾸만 애 취급 당하는 막내 백일섭은 허허 웃다가도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금세 심통을 부려 ‘백심통’이라 불린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쌓아왔던 이미지와 다른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6·25 때 쌀 포대 진 이후 처음으로” 배낭을 둘러메고 9박10일 유럽 여행을 떠났으니 이야기는 재미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진짜 이유는 노배우들이 낯선 장소에서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며 좌충우돌하는 설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할배들의 얼굴에서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순재의 진격하는 걸음이 그가 독불장군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비슷한 아버지를 겪었으므로 안다. 그것은 고집불통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조력 없이 여행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픈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나 계단 또 올라가면 장조림통 던져버리고 갈 거야!” 무릎이 아파 참다못해 심통을 부렸지만 여행 내내 두고두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던 백일섭의 눈빛을 보며 우리는 이런 아버지도 있지, 고개를 끄덕인다. “난 죽어갈 때도 잔상이 남아 있을 것 같아. 이런 모양이.”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이런 여행이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자꾸만 하는 신구에게서 지난 시간보다 남은 세월이 적게 남았음을 무심히 얘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할배는 자꾸만 마지막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오래 이어지면 좋겠다. 마침 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으며 다음 여행지가 정해졌다고 한다. 이번에는 대만으로. 그리고 다음 여행지는 또 어디냐고 자꾸만 묻고 싶다. 할배 다음에는 어디 가?

<한겨레21>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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