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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정이 넘치는 TV, 정이 고픈 사회

등록 2013-12-26 20:01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TV
내게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은 애초부터 없었다. 두 분 모두 부모님이 태어나시기 전, 제주 4·3 사건 때문에 돌아가시거나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때 실종되셨다. 하지만 요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아버지와 시아버지 두 아버지들을 통해서다. 아버지는 “65살에 놀면 동네에서 욕먹는다”면서 새벽부터 과수원에 나가신다. 덕분에 ‘과일바라기’인 내 딸은 여름에는 블루베리, 겨울에는 귤을 실컷 먹는다. 함께 사는 시아버지는 손주들을 위해 운전사·요리사 등 만능 슈퍼맨으로 변신하시고, 품절 사태를 빚은 또봇 쿼트란까지 뚝딱 구해오신다. 나와 함께할 시간이 있었다면 두 할아버지도 지금의 두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올해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 것은 아마 <티브이엔>(tvN)의 예능 <꽃보다 할배> 때문인 것 같다. ‘할배’라는 촌스러운 단어를 내세운 어르신들의 예능은 정이 고픈 사회를 제대로 관통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어 ‘직진’밖에 할 수 없는 이순재의 모습이 짠했고, 세월의 무게가 실린 신구의 말에 뜻 없이 소비되는 청춘의 나날을 되돌아봤다. 그들에게서 나의 두 아버지를 봤고 남편, 나아가 아들의 미래를 봤기에 더 공감이 갔던 듯하다. 그렇게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시끄럽고 차가운 금속 기계는 가끔 따뜻함을 토해낸다.

비단 할아버지만이 아니다. 2013년 텔레비전 속에는 ‘가족’이라는 화두가 넘쳐났다. 엄마 없이 떠나는 아빠와 아이들의 여행기(<아빠! 어디가?>)가 등장했고, 아빠들의 2박3일 육아 분투기를 담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뒤를 이었다. 아이 교육 문제로 가족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이성재)나 40대 노총각(김광규)이 홀로 사는 모습(<나 혼자 산다>)도 ‘관찰 예능’이라는 포맷으로 방영됐다.

이뿐인가. 엄마들의 육아기(<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엄마>), 이제 할머니가 된 여자 연기자들의 여행기(<마마도>)도 있다. 종편 예능으로 동시간대 지상파 예능을 위협한 <유자식 상팔자>(제이티비시)도 연예인 가정 청소년들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가족이고 정이다.

복고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도 정 때문인 듯하다. <응답하라 1994>의 사투리에서는 표준어로는 느끼기 어려운 투박한 정이 묻어난다. 속내가 사투리에 섞여 배출되고, 청춘의 기억이 사투리와 함께 반추된다. <응답하라 1994>가 10여년 전에 방송됐다면 지금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삶이 점점 팍팍해져서인지 모르겠다. 관찰 예능이 인기 있는 이유는, 아마도 나와 다르지 않은 남의 삶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은 아닐까? ‘먹방’(먹는 방송)이 유행한 것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허기 때문일 게다. 같이 밥을 먹거나 얘기를 나눌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해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상투적 일상어에 글자 하나만 더 붙은 “안녕들 하십니까”에 마음의 울림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정이 고파서. 마음이 허해서. 더군다나 “안녕들 하십니까”는 활자로 찍어낸 글씨가 아니라 꾹꾹 눌러쓴 손글씨 대자보였다.

아이를 낳지는 않지만 아이들 방송에 미소 짓고, 어르신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어르신 예능에는 감동하는 시대. 그래서 더 헛헛한 마음만 커져가는 시대. 2014년에는 현실에서 정에 굶주린 마음들이 채워지기를 바라본다. 오늘 두 아버지와 정이 담긴 얘기를 나눠야겠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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