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그대’엔 우주가 숨어있고
‘감격시대’에선 격정 느껴져
‘정도전’엔 사극 남성성 강해
드라마 이미지와 어울리는
아날로그 손글씨 증가 추세
‘감격시대’에선 격정 느껴져
‘정도전’엔 사극 남성성 강해
드라마 이미지와 어울리는
아날로그 손글씨 증가 추세
<별에서 온 그대>는 ‘우주’, <미스코리아>는 ‘왕관’, <정도전>은 ‘올곧음’. 보려는 의지만 있으면 다 보인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까지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 ‘간판’을 유심히 본다면 말이다.
드라마 시작 직전,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제목(타이틀)이다. 단지 글자일 뿐이지만 다양한 글씨체로 차가움, 날카로움, 따뜻함 등 세밀한 감정까지 표현해낸다. 캘리그래피 전문가가 만든 것은 더 그렇다. ‘아름다운 서체’란 뜻의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캘리그래피는 흔히 손글씨를 의미한다. 개성을 살리기 위해 최근 아날로그적인 손글씨를 쓰는 드라마 타이틀이 많아지는 추세다.
시청률 25%를 넘나드는 <별에서 온 그대>(에스비에스)의 타이틀에는 우주가 녹아 있다. ‘별에서 온 그대’니까 ‘별’도 빠질 수 없다. 포스터와 타이틀을 함께 제작한 디자인 업체 반디의 이용희 실장은 “시놉시스와 대본을 일부 보니 별에서 온 그대가 김수현일 수도 전지현일 수도 있었다. 우주에 별이 많이 떠 있는 느낌을 줬고, 반짝이고 부드러운 느낌의 필체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앞서 이 실장은 <주군의 태양> <야왕> <수상한 가정부> <유령> <샐러리맨 초한지>의 제목도 디자인했다. 이용희 실장은 “작가나 드라마 콘셉트에 맞게 타이틀을 만드는데, <주군의 태양>은 로맨틱코미디지만 귀신 보는 여자가 등장해 음산하고 어두운 호러 느낌을 주려고 했다. 가운데 글자에 십자가가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드라마의 주제를 살리려고 <샐러리맨 초한지>에는 장기짝, <유령>에는 사이버수사대를 상징하는 숫자 ‘0’과 ‘1’, 수갑 모양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야왕>에는 총탄에 맞아 유리가 깨진 듯한 느낌이, <수상한 가정부>에는 벽에 금이 간 듯한 느낌이 녹아 있다.
이처럼 드라마 타이틀의 이미지는 직접적이면서 은유적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는 따뜻한 느낌으로 흩날리는 바람이, <비밀>에는 여주인공 황정음의 흐르는 눈물이 녹아 있는 식이다. <상어>는 상어 지느러미가 연상되고, <굿닥터>에는 휴먼 메디컬 드라마라는 특성 때문에 파랑새 이미지와 헌혈 심벌이 녹아 있다. 1940년대 청춘 남녀 이야기를 다룬 <빠스껫 볼>은 “오래된 벽화의 느낌”을 원한 곽정환 감독의 요청에 따라 40년대 서체를 응용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비밀> <직장의 신> <칼과 꽃>을 작업한 패션디자이너 출신 캘리그래퍼 전은선씨는 “<칼과 꽃>에서 ‘칼’은 진짜 칼처럼 ‘꽃’은 진짜 꽃처럼 형상화했듯, 캘리그래피는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작업이다. 글씨체도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대하 사극처럼 남성성이 부각될 때는 붓글씨 같은 굵은 글씨체가 사용된다. <정도전>이 한 예다. 대표적인 캘리그래퍼로 꼽히는 강병인씨는 개인 누리집에서 “대하 드라마 타이틀을 쓴다는 것은 드라마 무게만큼 무겁다. 불의와 맞서고 오직 백성을 위해 나라를 세우겠다는 올곧은 정도전, 그를 글씨에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천일의 약속> <엄마가 뿔났다> <공주의 남자> <착한 남자> 타이틀도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은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조달환의 솜씨다. 어릴 적 난독증을 겪는 와중에 손글씨 솜씨가 늘었다는 그는 개인 전시회까지 여는 전문가가 됐다.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 타이틀도 썼다. 조달환은 “<천명>은 3000여번 쓴 것들 중 하나를 골랐지만, <감격시대>는 대본을 받고 거의 한 번에 썼다. 속도감 있고 힘있게 묘사하면서 포인트만 하나 주면 되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 타이틀은 부탁을 받으면 무료로 써준다. 영화 <해적> 타이틀도 그의 작품이다.
이용희 실장은 “콘셉트 잡는 시간부터 해서 보통 2개월이 걸리는데, 그 드라마를 사랑하면서 작업을 해야 잘된다. 연출가와 작가가 원하는 방향을 알아야만 좋은 캘리그래피가 나온다”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한 작품당 보수는 대략 200만~300만원으로 알려져 있다.
함영훈 <한국방송>(KBS) 책임피디는 “캘리그래피는 드라마의 톤과 정서를 담는데, 젊은 피디들이 점점 미적 감각을 중시하면서 컴퓨터그래픽보다는 캘리그래피 전문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