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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이 의뭉스런 이야기꾼들을 어떡하나

등록 2014-03-21 19:44수정 2014-03-22 10:35

엠비시에서 방영한 <113 수사본부>
엠비시에서 방영한 <113 수사본부>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나와 절친한 P씨는 한때 드라마 마니아였다. 정리벽이 있는 그는 컴퓨터 외장하드에 좋아하는 드라마, 만화책, 영화를 질서정연하게 모아놓곤 했다. 마니악한 취미생활을 그만둔 이유는 언젠가 누가 “이야기 좋아하면 고단하게 산다던데” 했던 말이 귀에 맴돌아서는 아니다. 그는 이야기 덕분에 삶이 더 풍요롭다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드라마 보기를 관둔 이유는 삶이 충분히 드라마 같아지면서다. 로맨틱 코미디, 액션이나 스릴러는 아니지만 중박의 시트콤이나 일일연속극 정도는 찍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이 늘고 팍팍한 일상에 빠져들면서 그는 타인의 이야기에 눈과 귀를 돌릴 겨를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텔레비전과 영이별할 수 없었던 그는 가끔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른다. <엠비시 드라마넷> <에스비에스 플러스> 등 드라마 채널에 고정돼 있던 그의 리모컨은 이제 뉴스 채널의 번호를 외고 있다. 그는 이야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뉴스에는 연일 드라마보다 스펙터클이 더한 뉴스가 한창 떠들썩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등 지난해 스크린을 지배한 코드인 간첩물이 이내 텔레비전 드라마로 넘어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티브이가 다루는 간첩 코드는 뉴스로 직행했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은 증거조작 의혹으로 들여다볼수록 더 드라마틱하다. 북에서 나고 자란 화교 출신 유우성씨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다섯차례 밀입북하고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탈북자 200여명의 신원을 북한에 보고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기소됐다. 유우성씨는 2006년 모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차례 중국을 경유해 북한에 다녀온 적은 있지만 간첩 활동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우성씨는 지난해 1월 구속 기소되었다가 12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검찰은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지우지 않고 더 많은 증거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증거들이 아리송하다. 그를 북에서 여러 차례 봤다는 증인들은 불분명한 증언을 쏟아내고, 국가정보원이 ‘공식적으로’ 입수했다는 유우성씨의 출입경기록은 중국 정부에 확인한 결과, 검찰이 제출한 서류 3개 모두 진본이 아님이 밝혀졌다. 국정원이 화살을 돌린 협력자 김아무개씨는 증거조작 의혹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자살을 기도했다. 그의 유서에는 “가짜 서류 제작비 1천만원” 등의 문장이 적혀 있다.

뉴스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간첩 사건은 한참을 후퇴해 오래전 들어봤던 이야기인 것만 같다. 1970~80년대 텔레비전에서 흥하는 코드가 있었다. <수사반장>류의, 누군가를 ‘때려잡는’ 드라마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엠비시에서 방영한 <113 수사본부>, 티비시의 <추적>은 각각 9년, 7년 이상 방영되며 인기를 누린 장수 프로그램이다. 두 프로그램을 합치면 방송 횟수가 800회를 넘을 정도로 드라마는 다종다양한 간첩 이야기를 쏟아냈다. 1977년 8월27일치 <경향신문>에 실린 드라마 <113 수사본부>의 예고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침략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괴는 19세의 미성년자를 그들의 간악한 흉계에 이용한다. 청소년을 간첩으로 남파시킨 북괴는 그들의 젊음과 꿈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리는데….” 이런 식이다. 두 드라마는 부부 간첩, 재일동포 간첩, 납북 어부 간첩, 학사주점 주인을 가장한 간첩 등 이른바 ‘북괴’가 우리 일상에 파고들었음을 강조하며 이웃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간첩들은 국가 기밀을 빼내기 위해 평범한 시민을 포섭하거나 살인을 서슴지 않는 등 잔혹한 인물로 그려지며 공포심을 조장했다.

국정원과 검찰은 70년대 드라마가 그랬듯 ‘일망타진’의 꿈을 그렸겠지만 이야기는 들여다볼수록 점입가경이 되었다. 1부로 끝날 수 있었던 이야기에 등장인물을 더 끼워 넣고 흥행 코드를 곁들여 판을 키워보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반응은 의혹과 조롱뿐이다. 꼬고 꼰 이야기의 결마다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는 정황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 의뭉스런 이야기꾼들을 어떡하나, 이야기 좋아하면 고단하게 산다던데.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관련영상] [#9.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여간첩 원정화 사건, 공소장이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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