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개그대상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이국주에게 표를 던지겠다. 워낙 잘 웃기는 개그우먼인 그는 우리에게 선물해준 웃음의 크기만으로도 상을 받아 마땅한데다 상반기 하반기를 사이좋게 나눠먹은 유행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의 유행어는 단순한 재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 보이고 있다. 너무 거창한가?
이 칼럼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올 상반기 최고의 유행어 ‘의리’. 그야말로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이 사회에 우둔하고 인간미 넘치는 ‘의리’의 정서를 전염시켰다. ‘의리’라는 단어처럼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익룡처럼 사라진 줄 알았던 김보성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준 것은 덤으로 치고는 정말 큰 덤이었다. 모두 이국주의 혀에서 시작된 일이다.
오늘 얘기할 그의 유행어는 하반기 최고의 유행어가 틀림없는 ‘호로록’. 사전적 의미로는 두가지 뜻이 있다. (1)작은 새 따위가 날개를 가볍게 치며 갑자기 날아가는 소리나 그 모양. (2)적은 양의 액체나 국수 따위를 가볍고 빠르게 들이마시는 소리 또는 그 모양.
그렇다. 사전에 있다. ‘브금’(BGM·배경음악)이나 ‘졸귀’(졸라 귀엽다) 같은 외계어가 아닌, 우리말 사전에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순수 우리말이기도 한 ‘착한’ 유행어인 셈이다.
다른 개그맨은 이 유행어를 이만큼 유행시킬 수 없었을 거다. 이국주 정도의 ‘사이즈’는 돼야 호로록의 진정성이 느껴지니까. 개그우먼들도 탤런트들처럼 날씬하고 예뻐지는 트렌드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국주는 살집 좋은 풍채를 당당히 카메라 앞에 내세운다. 적게 먹고 싱겁게 먹는 건강비법을 조롱하듯 실제로 먹방을 시전하며 “호로록”을 외쳐댄다. 먹는 척하거나 깨작깨작 먹지 않는다. 진짜 대단한 양을 제대로 먹어치우며 뱉어야 그 맛이 제대로 사는 유행어가 호로록인 것이다.
왜 우리는 호로록에 열광할까? 배덕감에서 오는 쾌감 때문이다. 과식을 하거나 맵고 짠 음식을 먹고 나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아 죄책감 느껴.” 먹는 게 죄는 아닐진대 우리는 먹고 나서 죄책감을 느낀다. 벌써 몇년째, 아니 십수년째 우리는 날씬하고 건강한 몸으로 지낼 것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티브이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주변 사람들도 살찐 사람을 게으름뱅이나 매력 없는 사람 취급을 해왔다. 이국주의 호로록은 그런 지나친 도덕률을 정면으로 비웃으며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압구정역 사거리, 신사역 사거리를 최근에 가본 적 있나? 한때 맛집도 많고, 술집과 카페도 많고, 공연장도 제법 있던 두곳은 성형타운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규격에 맞는 날씬한 몸과 얼굴로 살고 싶은 여자들이 떠받치고 있는 어마어마한 성형시장의 수도랄까. 성형외과를 찾는 여자들은 피땀 흘려 일한 돈을 털어 자신의 살을 덜고 뼈를 깎아내며 고통까지 감내하는 것이다.
압구정역이나 신사역 사거리에 가면 성형수술을 하고 마스크를 쓴 여자들을 자주 마주친다. 어떤 식당에서 기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이른바 마스크녀들이 티브이에 나오는 이국주를 멍하니 보고 있더라. 그때 알았다. ‘호로록’은 단순히 식탐의 희화화를 넘어서 외모지상주의까지 건드리고 있는 사회학적 유행어라는 사실을.
너무 건강할 필요 없다. 너무 날씬해질 필요 없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미래의 욕망만큼 현재의 욕망도 중요하다. 매일 과식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가끔 과식할 때 괴로워하지 말라는 얘기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일주일에 한번쯤 밤 10시에 라면을 먹어도 대세에 지장 없다. 그래야 지금 행복해진다. 이렇게 장황한 메시지를 단 한 단어로 대변하는 이국주를 위해 치맥으로 건배를! 호로록!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