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엔 <미생>
이재익의 명대사 열전
어디서 동정질이야? 한 가정의 가장에게.”
- 웹툰 ‘미생’ 중에서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드라마 한 편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미생>(티브이엔). 기발한 설정, 자극적인 관계들이 판을 치는 드라마들의 틈에서 <미생>은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도리어 이질적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드라마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놀랄 만치 닮은 점도 있고 의외로 많이 변형된 부분들도 있다. 의미심장한 대사를 잘 쓰기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답게 웹툰 <미생>에도 반짝반짝한 대사들이 많은데 그 중 드라마에서도 꼭 보고 싶은 대사가 있다.
신입사원으로 종합상사에서 일하던 주인공 장그래는 하청업체에서 온 사람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러자 팀장인 오 차장이 장그래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한다.
“어디서 동정질이야? 한 가정의 가장에게.”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데, 동정심이라는 감정은 내가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오만함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약자에게 갖는 감정인 것이다. 언뜻 보면 따뜻한 휴머니티의 일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동정은 무척 조심해서 베풀어야 한다. 오만함이 없는 순수한 배려로서 베풀 때 동정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오 차장이 장그래를 혼낸 일도 동정심의 기저에 음험하게 깔려있는 오만함을 경계하라는 의도에서였을 거다.
특히 일로 맺어진 관계에서 ‘을’에 대한 동정은 상황만 달라지면 을에 대한 횡포로 바뀌기 쉽다. 나보다 약한 사람이니 불쌍하게 여겨야한다는 ‘갑’의 착한 마음은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 내가 급하면 언제든지 나보다 약한 사람이니 밟고 가자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일 관계에서는 아예 감정을 갖지 않고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동정은 삼가되 존중은 잃지 말아야한다. 존중이란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이다.
서울 강남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주민의 횡포로 경비원이 분신자살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필자도 그 아파트 주민이었기에 그곳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다. 경비아저씨들의 업무가 단순한 집지키기에 끝나지 않는다. 주차공간이 부족한 데다 단지 내 차들 중에 고가의 외제차량이 많아 경비원들이 주차대행 서비스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다른 아파트 단지에 비해 노년층 거주 비율이 높아서 그런지 경비원들이 주민들 심부름을 하는 일도 많이 봤다. 그럴 때마다 경비원들에게 돈을 더 쥐어주기도 하고. 상황이 이러다보니 경비원을 경비원으로 존중하지 않고 종으로 여긴 주민이 있었나 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며 가해자인 주민을 무정하다 욕했지만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비껴나간 시선이다. 차라리 무정하게 대했으면 나았을 테지.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우리가 을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에서 파생된 사건이다. 경비원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존중의 대상이다. 경비원뿐 아니라 을의 처지에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웹툰 <미생>에서는 비록 한 가정의 가장을 동정하지 말하는 조건을 붙였지만 난 어떤 입장의 을도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감히. 그러나 존중만큼은 그들의 당연한 몫이다.
갑(또는 스스로를 갑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여, 감히 동정하지 말 것.
아직 드라마 <미생>은 이 대사가 나오는 대목까지는 진행되지 않았다. 각색 과정에서 부디 빠지지 않았기를 빈다. 해서 동정과 존중을 헷갈리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놔주기를. 나에게 그랬듯이.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 웹툰 ‘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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