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친절한 기자들] 청소년 보호·건전한 가정생활·생명윤리 세가지 측면에서 “제재 정당했다” 근거 대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가치에 동의하시나요?
임성한의 ‘압구정 백야’ 드라마 갈무리
“가족의 가치를 저해”하는 ‘막장’ 드라마를 두고 윤리의 잣대로 법적인 제재를 내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25일 임성한 작가의 일일 드라마 <압구정 백야>에 내려진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공개됐습니다. ‘더 친절한 기자들’에서 법원 판결문을 자세하게 뜯어보면서 판결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봤습니다.
문화방송(MBC)은 2014년 10월부터 2015년 5월까지 149부작으로 평일 오후 8시55분부터 오후 9시30분 시간대에 <압구정 백야>를 방송했습니다. <압구정 백야>는 어린 시절 어머니(은하)로부터 버림받은 여성(백야)이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의 의붓아들(나단)과 결혼해 며느리가 되는 과정이 주된 내용입니다. ‘15살 이상 시청 가’ 등급입니다. 특정한 장면들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지만, 한때 시청률이 19.1%까지 치솟을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15년 3월 회의를 열고 <압구정 백야>에 대해 심의했습니다. 논의 끝에 4월15일 이 드라마의 ‘관계자에 대한 징계’를 명령합니다. 징계 이유는 이랬습니다.
“청소년 시청 보호 시간대에 편성된 드라마에서 친딸이 며느리가 되는 상황을 주된 내용으로 방송하면서,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가 사실상 친딸인 며느리에게 수차례 폭언을 하고, 물을 뿌리며 따귀, 머리 등을 때리고, 친딸이 어머니에게 친아들과 양아들을 죽게 했다고 소리치는 내용, 맹장염에 걸린 어머니의 병문안을 간 아들이 깡패들과 시비 끝에 벽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는 등 지나치게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상황 설정 및 폭언과 폭력 장면을 수차례 방송하였으므로, 이 사건 방송은 방송심의규정 제25조 제1항, 제44조 제2항에 위반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방송심의규정 제25조 제1항은 ‘방송은 국민의 올바른 가치관과 규범의 정립, 사회윤리 및 공중도덕의 신장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44조 제2항은 ‘어린이 및 청소년 시청보호 시간대에는 시청 대상자의 정서 발달과정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MBC는 징계에 반발했습니다. 법원에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내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1) 드라마의 소재나 극의 전개가 비윤리적이거나 극단적인 장면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권선징악이라는 드라마의 전체 주제, 방송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 은하가 백야를 때리는 장면, 폭언하는 장면은 사회 통념의 범위 내에 있다.
2) 방송이 청소년 시청 보호 시간대에 방영되었다 해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 다른 매체를 통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드라마를 볼 수 있다.
3) 드라마가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엄한 제재는 시청자들의 평가를 등한시한 것이다.
4) 이 드라마와 비슷한 유형의 드라마에 대해 이처럼 중한 조처를 취한 적이 없어 형평에 어긋난다.
MBC의 이런 주장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판결의 주된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임성한 작가 드라마 징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임성한 작가와 MBC는 2013년에도 <오로라 공주>라는 드라마를 쓰고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오로라 공주>를 두고,
1) 이혼을 요구하는 둘째 아들에게 아내가 몸에 걸쳤던 수건을 펼쳐보이며 “내 친구 미옥인 천만원 들여서 가슴 부풀렸어. 다들 부러워하고 감탄해. 마흔셋에 이 정도 유지하는 아줌마 봤어?… 다른 집 남자들은 들어오면 주물러 터트려서 귀찮아 죽겠대. 토끼 주제에”라고 말하고 이에 둘째 아들이 “식어빠진 사발면을 그럼 1, 2분이면 해치우지, 20~30분 걸려 먹느냐?”라고 말하는 장면
2) 둘째 아들과 불륜 관계에 있다가 이별을 통보받은 박주리에게 계모인 왕여옥이 위장 임신을 부추기는 장면
3) 셋째 아들이 형에게 ‘팔자 좋은 년’ 시리즈를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방송심의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MBC 드라마 본부장은 심의 과정에 “앞으로는 <오로라 공주>의 작가(임성한)와 계약하지 않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취지의 말을 합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사정 등을 고려해 애초 ‘과징금’ 조처에서 ‘드라마 관계자에 대한 징계 및 경고’로 제재 수위를 낮추었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도 이를 인정했네요. 그런데 MBC는 이 약속을 어기면서 임성한 작가와 또 계약을 맺고 <압구정 백야>를 방송한 겁니다.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마지막에 설명하겠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차행전 부장판사)는 이런 맥락을 종합해 방송통신위원회의 MBC에 대한 징계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판결 이유를 보면, 재판부는 크게 세 가지 가치 지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청소년 보호’라는 가치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방송 편성의 자유는 헌법 및 법률에 의하여 인정되는 기본적 권리이고 청소년의 알권리 역시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권리”라면서도 “방송법은 건전한 가정생활과 아동 및 청소년의 선도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음란·퇴폐 또는 폭력을 조장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 등은 청소년의 인격 미성숙성과 경제적 비자립성 등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압구정 백야>가 “청소년의 정서 발달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청소년의 올바른 가치관 등을 저해하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고 판시합니다. 재판부가 근거로 든 방송법 제5조 제5항은 ‘방송은 건전한 가정생활과 아동 및 청소년의 선도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음란·퇴폐 또는 폭력을 조장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6조 제3항은 ‘방송은 국민의 윤리적·정서적 감정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방송심의규정 제43조 제1항은 ‘방송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좋은 품성을 지니고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압구정 백야>가 “폭언과 폭력 장면을 포함해 청소년의 좋은 품성과 건전한 인격 형성에 저해될 수 있는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청소년의 정서 발달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가치는 ‘건전한 가정생활’입니다. 재판부는 드라마 장면을 하나씩 짚어가며 이 드라마가 ‘건전한 가정생활’이라는 가치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재판부가 짚은 방송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1) 딸 백야가 친어머니 은하에게 자신이 친딸임을 밝히는 장면에서 은하가 백야에게 “버러지 같은 게, 인간 같지도 않은 게”, “미친 게 어디 입에서 나오는 대로”라고 말하고, 컵에 담긴 물을 백야에게 뿌리면서 상당한 시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백야의 뺨, 머리, 몸 등을 구타하는 장면
2) 백야가 어머니인 은하에게 “당신 같은 사람이 날 낳았다는 게 소름 끼치게 싫어. 버러지 같은 게? 버러지가 버러지를 낳았겠지. 사람이 낳았을 리 있어? 그래요, 나 버러지 맞아. 짐승만도 못한 버러지야”라고 소리치는 장면
3) 백야가 은하에게 “당신은 유부남을 꼬신 것밖에 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하는 장면
4) 백야가 은하에게 “죽은 혼자 다 퍼먹어라”라고 소리치는 장면
등입니다. 재판부는 이 장면들을 두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또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폭언과 폭력 행위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사와 극의 내용이 사회적 윤리의식, 가족의 가치를 저해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정서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밝힙니다.
세 번째 가치는 ‘생명 윤리’입니다. 재판부는 나단이 우연히 깡패들과 시비로 사망하는 장면(▶관련 영상)을 두고 “나단의 사망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억지스럽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시청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나단의 사망은 죽음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며 “이와 같은 방송은 생명윤리에 어긋날 소지가 있고, 극단적이며 자극적인 상황 설정을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재판부가 내세운 이 세 가지 가치, 여러분도 동의하시나요? 청소년 보호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청소년의 좋은 품성과 건전한 인격’이라는,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주관적 가치를 절대적인 잣대로 삼고 있진 않을까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머니와 딸이 갈등하면 ‘건전한 가정생활’이 왜곡되는 걸까요? 애초 ‘건전한 가정생활’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황당한 죽음은 정말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정합성 문제가 아니라 ‘생명 윤리’를 저해할만한 내용일까요? 여기서 저해된 ‘생명 윤리’란 무엇일까요? 여러모로 궁금함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MBC 쪽이 주장한 ‘드라마가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엄한 제재는 시청자들의 평가를 등한시한 것’이라는 논리도 허점이 많습니다. 소비자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면 내용이 어떻다 해도 문제없다는 논리인데요. 방송이 여성이나 이주민,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 표현을 담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내보내더라도 시청률만 높으면 문제없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정말 그런가요? 차분히 한 번 생각해볼 지점일 것 같습니다.
참, 중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에 대해 마지막에 그 이유를 설명드린다고 했지요. 재판부는 MBC 쪽이 주장한 ‘비슷한 유형의 드라마와의 형평성’ 문제 지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재판부는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에 대해 같은 수준의 처분을 받은 적 있고 △MBC가 ‘앞으로는 임성한 작가와 계약하지 않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으며 △<압구정 백야> 외에도 임성한 작가의 여러 드라마에 대해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노출 등을 이유로 제재 처분을 받은 적이 있고 △MBC는 <압구정 백야> 방송 당시 저품격 드라마에 대한 피고의 집중심의 기간임을 알고 있었던 점 등을 보면, 방송통신위원회가 MBC에만 명백한 차별 행위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MBC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이 판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네요. 여러분은 이 판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