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훈훈한 대화 뒤로 은밀하면서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곤 했으니, 바로 리모컨 주도권 싸움이다. 명절 특집 영화 하나를 놓고도 의견이 갈리는 마당에 큰 아버지가 선택한 ‘팔도장기자랑’류의 예능을 함께 웃으며 지켜봐야 하는 시련이라니. 언제 어디서나 내 맘대로 콘텐츠를 골라볼 수 있는 온라인 동영상 시대의 진정한 미덕은 이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안방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준비해봤다. 온라인 동영상 시대가 낳은 최고의 시청문화 ‘드라마 몰아보기’로 명절 연휴를 최대한 즐기는 법.
‘드라마 몰아보기’에서는 어느 정도 현실과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해 중국의 한 대학생이 컴퓨터로 <한국방송>(KBS) <태양의 후예>를 쉬지 않고 보다가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는 한 기사는 ‘도시괴담’ 같지만, 적어도 ‘드라마 몰아보기’가 ‘폐인 시청’과는 달라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몰아볼 만큼 재미있되, 현실과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걸 추천한다. 말하자면 드라마를 다 본 뒤에도 마음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무언가 가슴에 ‘남는’ 느낌의 작품들이 좋겠다는 거다. 주제별 몰아보기도 한 방법이다. ‘혼족’부터 ‘사회비판’까지, 올해 대중문화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작품 리스트를 여기 소개한다.
첫 번째 추천작은 일본드라마 <심야식당: 도쿄스토리>다. 소위 ‘먹방’의 원조 격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심야식당>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이번 시즌은 특별히 ‘드라마 몰아보기’ 문화를 자리잡게 만든 인터넷 동영상업체 <넷플릭스>에서 제작되어 190여개국에서 공개됐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보편적이면서도 트렌디한 이야기에 있다. 여전히 자정에서부터 아침까지만 운영하는 작고 허름한 식당에서, 말수는 적어도 인심은 넉넉한 식당 주인이 외로운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위안의 정서는 시대를 초월하나 손님으로 찾아오는 현대 도시인들의 모습을 통해 ‘혼족’의 시대를 통과하는 특별한 고민이 잘 담겨 있다.
두 번째 추천작은 국내드라마 <세계의 끝>이다. 2013년 <제이티비시>에서 방영된 이 작품은 지난해 대중문화 최고의 키워드이자 올해 역시 이어질 ‘재난물’ 유행의 징후를 미리 보여준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와 사투하는 질병관리본부 의사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는 고뇌를 다룬 감염재난물이면서 동시에 한국 관료 시스템의 부조리를 비판한 사회고발극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라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작품이다. 이미 정성주 작가와 함께 만든 <밀회>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예언한 장본인으로 주목받은 안판석 피디의 예지자적 혜안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다.
김선영/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