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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폭력에 무감각한, 그래서 더 잔혹한

등록 2017-04-14 20:32수정 2017-04-14 20:51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뉴질랜드 호주 영미 합작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

모친의 병문안차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로빈 그리핀(엘리자베스 모스) 형사는 아동보호국으로부터 한 소녀의 자살기도 사건에 대한 수사 협조를 요청받는다. 투이 미첨(재클린 조)이라는 이름의 12살 소녀는 호수 한가운데서 구출될 당시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로빈은 진심을 다해 투이를 돕고 싶어하지만 아이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강간범이 가족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사건은 점점 잔혹한 비극이 되어간다. 설상가상으로 투이는 종적을 감춰버리고, 전력을 다해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가던 로빈은 그 중심에 마을 전체의 어두운 비밀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탑 오브 더 레이크>는 영화 <피아노>로 잘 알려진 제인 캠피언 감독이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티브이 시리즈다. 얼핏 목가적인 마을의 이면에 감춰진 거대한 폭력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전설적 티브이 시리즈 <트윈 픽스>,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혀가는 플롯은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 불리는 에이엠시(AMC)의 수작 드라마 <더 킬링>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제인 캠피언은 단순히 기존의 뛰어난 수사물의 영향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특유의 개성을 불어넣은 연출로 큰 호평을 받았다. 감독의 모국인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십분 활용하여 그 안에 대조적인 폭력의 음울한 그림자를 새겨 넣은 서늘한 영상미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맞물려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탑 오브 더 레이크>가 묘사하는 비극의 잔혹성은 겉으로 드러난 추악한 범죄보다 호수 위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마을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에 대한 무감각에 있다. 도입부에서부터 대놓고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투이의 부친 맷 미첨(피터 뮬란)의 악행 못지않게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빈을 무시하는 지역 경찰들의 비협조적 태도도 폭력적이긴 마찬가지다. 이 마을 주민들이 늘 약과 술에 취해 있거나 몸 또는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은 편재한 폭력의 단적인 증후다. 이로 인한 상처는 늘 그 사회의 약자들을 먼저 향하게 마련이다. 극 중에서 투이의 실종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로빈에게 ‘이미 죽은 아이를 찾기 위해 그 정도의 수고와 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일축하는 한 경찰의 논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힘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쉽게 은폐되고 잊힌다. 드라마는 이러한 약자의 비극을 통해 이 시대의 마비된 윤리, 그 폭력성을 성찰한다.

김선영
김선영
<탑 오브 더 레이크>는 올해 두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니콜 키드먼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시즌2는 다가올 제7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될 예정이다. 영화제 측은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 시즌3과 함께 황금종려상 수상자 감독들의 티브이 시리즈를 특별 상영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한 두 작품이 새 시즌에서 얼마나 더 깊은 성찰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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