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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과잉노동 사회의 씁쓸한 판타지

등록 2017-04-21 19:39수정 2017-04-21 20:26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28세 여성 기리나카 가스미(마노 에리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초등학교 교사직을 과로로 인해 그만둔다. 생계를 위해 국영 직업소개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아도 좀처럼 오래 일하지 못한다. 직업소개소 담당직원(아사노 아쓰코)은 지나치게 열심히 하려는 가스미의 태도가 문제라며 매번 그녀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일자리를 소개해준다. 가스미는 감시회사 아르바이트에 이어 이번에는 적자로 폐지 위기에 놓인 한 버스 노선의 광고를 따내는 일을 떠맡게 된다.

일본 <엔에이치케이 비에스>(NHK BS)의 2분기 드라마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번아웃 증후군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으로 인해 무기력해지는 이 증상은 과잉노동이 일상화된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다만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이를 무겁고 심각하게 전면화하기보다는 엉뚱하고 코믹한 표면 아래 음각으로 새겨넣는 방식을 택한다. 공장 파견노동자의 투잡 생활을 다룬 아쿠타가와 수상작 <라임포토스의 배>를 비롯해, 꾸준히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온 쓰무라 기쿠코의 동명 원작소설을, 일상적이고 경쾌한 에피소드 안에 사회적 주제를 녹여내는 작가 쓰치다 히데오가 각색해 독특한 직장 판타지물로 탄생시켰다.

드라마는 직업소개소가 추천하는 직장의 기이한 풍경과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는 가스미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이면에 깔린 현실은 결국 부조리한 노동환경이다. 버스 안에 무기력하게 앉은 가스미와 차내에 흘러나오는 직장인 대상 광고 음성을 대화하듯 연출한 도입부가 대표적이다. 모든 기력이 소진된 그녀는 재충전을 위해 광고의 유혹에 굴복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고 또다시 과로해야 하는 악순환에 갇혀 있다. 22개의 정류장만을 거치는 버스에 무려 99개의 광고를 욱여넣기 위해 1건당 10초 이내의 원고를 만들어내는 업무 역시 현대 직장인들의 노동 강도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한다.

이 작품은 최근 과로와 번아웃 증후군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른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다. ‘일벌레’라는 별명을 미덕처럼 여겨온 일본의 오랜 노동문화의 부작용은 저성장 시대를 맞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2015년 일본 최대 광고회사 신입사원의 과로로 인한 자살 사건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나마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나서서 ‘과로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대책 마련에 고심한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다만 일본보다 치열한 성과주의와 열악한 노동조건 안에서 과로와 폭력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한 방송사 신입 피디의 유사한 비극이 무려 6개월 뒤에야 알려지고 해당 기업과 정부는 무관심으로 대처하는 이곳의 현실이 그 위에 겹쳐져 자꾸만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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