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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첨밀밀>, 우리에게 등려군을 선물하다

등록 2017-06-04 15:17수정 2017-06-04 16:03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영화 장르 중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장르는 단연코 멜로 영화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멜로 영화는 그저 그런 수준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적지 않은 연애를 해봤는데 대부분의 멜로 영화들은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연애보다도 시시하니까. 그런 이유로 좋은 멜로 영화는 참 만들기 어렵다. 너도나도 하는 것이 연애일진대, 돈 주고 아까운 시간을 들여 남의 연애를 감상할 정도로 잘 만들어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의 감동은 다른 어떤 장르 영화보다 오래간다. 끝내주는 공포 영화를 봤을 때의 쾌감과 끝내주는 멜로 영화를 봤을 때의 여운, 어느 쪽이 더 오래가는지를 생각해보라.

<첨밀밀>은 내가 지금껏 본 멜로 영화 중에서 가장 오랜 여운을 준 영화다. 가장 많이 다시 본 영화이기도 하다. 매년 연말이면 혼자 술을 마시면서 이 영화를 본다. 일종의 의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이런 의식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너무 오래 치러온 의식이라 이제 와 그만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첨밀밀>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영화라고. 그리고 등려군(덩리쥔)이라는 가수를 알게 해준 영화라고.

등려군은 1953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인기 드라마의 주제가를 부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중화민국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했고 20살이 되던 해부터 일본 활동도 시작했다. 이토록 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1970~80년대에 우리나라의 외교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문화적으로 몹시 폐쇄적이던 군부정권하에서 일본 대중음악도 음성적으로만 전해지던 시기였으니까.

등려군은 천안문 사건 반대집회 등 중국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홍콩으로, 또 파리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섬뜩하게도 겨우 30대 중반이던 1990년 즈음부터 등려군이 죽었다는 루머가 주기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1995년 5월, 치앙마이의 한 호텔에서 진짜로 사망했다. 향년 42. 타이베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러졌고 전세계 3만여명의 팬들이 몰렸다. 타이베이시 동북에 자리하고 있는 그녀의 묘에는 음향장비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고 하니, 대만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야겠다.

내 또래 아재, 언니들의 젊은 시절은 홍콩 영화를 빼고 말할 수 없다. 총알이 난무하는 누아르 영화나 왕가위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류 영화들 속에서 소위 정통 멜로 영화인 <첨밀밀>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빛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국내외 상황 때문에 생전에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던 등려군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계기가 바로 영화 <첨밀밀>이다. 남녀주인공인 여명과 장만옥의 연애사와 등려군의 노래는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엮여 영화를 수놓는다. 심지어 등려군의 실제 인생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또 많은 한국의 아재 언니들에게 첨밀밀 없는 등려군이나 등려군 없는 첨밀밀은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도 영화를 볼 때마다 등려군의 노래 선율이 절로 귓가를 맴돌고, 등려군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여명과 장만옥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눈앞에서 빛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영화 평론가들이 <첨밀밀>에 대해 어떻게 평하는지는 모르겠다. 감독인 진가신이 밝힌 연출의 변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끝나지 않는 사랑. 헤어져도 또 만나게 되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열정이 되살아나는, 그런 사랑. 멋진 모습도 못난 모습도 모두 끌어안는 사랑. 서로를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나오는 사랑.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뿐 아니라 조연들도 모두 자기 나름의 사랑을 한다. 그 모습이 또 참으로 예쁘다. 실로 사랑의 향연이라고 할 만하다. 등려군의 노래 역시 마찬가지. 그야말로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부르는 노래 같다.

어느 먼 훗날, 달빛 은은한 밤에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을 들으며 마음이 촉촉해지지 않는다면, 그날이 내 자신의 영혼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날이 될 것이다. ‘꼰대야, 너는 이제 끝났어!’ 노래를 듣지도 않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오는 걸 보니, 아직 이 아저씨의 영혼은 건강한가 보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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