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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내 신발을 훔쳐간 팝스타, 티파니

등록 2017-06-16 22:41수정 2017-06-16 22:55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티파니가 낸 음반들.
티파니가 낸 음반들.
1980년대 후반 미국의 팝 시장을 양분하던 여성 아티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티파니와 데비 깁슨이었다. 전 시대에 마돈나와 신디 로퍼가 그랬듯, 후에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그랬듯이.

누나들이 아하가 좋으냐 듀런듀런이 좋으냐를 놓고 떡볶이집에서 침 튀기며 싸우던 그때, 나는 티파니와 데비 깁슨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막 성에 눈을 뜬 중학교 1학년 소년에게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랑까지 나누는 생애 첫 ‘걸프렌드’를 고르는 간택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무척 지고지순한 아이였다. 하루는 티파니, 하루는 데비 깁슨과 만나는 방탕한 소년이 되긴 싫었다. 한 여자에게만 오롯이 충실하고 싶었다. 누구를 고를까 두구두구두구두구, 내가 택한 여친은 티파니였다.

우리는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여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이듬해 겨울, 내 생애 첫 포르노 비디오를 보던 때까지 사귀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요? 내 첫사랑 티파니.

티파니는 1971년생이다. 1987년에 데뷔했으니 열일곱살의 나이에 팝 시장을 평정한 아이돌 스타였던 셈이다. 청순한 얼굴의 소유자였는데 목소리는 외모와 달리 힘 있고 카랑카랑했다. ‘시원스러운 가창력을 가진 청순가련 소녀’가 바로 그였다.

지금 들어봐도 노래를 참 잘한다. ‘아이 싱크 위아 얼론 나우’, ‘쿠드브 빈’ 같은 노래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가 뮤직비디오에서 췄던 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우리나라 가수 박남정이 얼굴 옆과 아래로 손바닥을 왔다 갔다 했던 그 춤 말이다. 둘 중 누가 그 춤의 원조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저도 몰라요.

티파니는 여러 방면에서 나에게 첫 경험을 선사했는데, 그의 내한공연은 내가 처음으로 본 대중가수의 공연이었다. 장소는 경기 안양공설운동장. 겨우 중1이었던 내가 혼자 그렇게 멀리까지 가본 적도 처음이었다.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화려한 조명과 벽처럼 쌓아올린 스피커들 앞에 서자 나올 오줌도 없는데 오줌이 마려웠다.

공연 시작. 세트리스트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눈물까지 흘리며 티파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따라 췄던 기억뿐이다. 집에서 몰래 갖고 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는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고 나에게 윙크했고 손짓했다. 무대 위에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를 위해 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두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곡까지 부르고 그는 무대를 떠났다. 아쉽다. 너무나도 아쉽다. 그를 또 볼 수 있을까? 나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청했다. 시간을 돌려달라고. 그런데 이럴 수가! 정작 돌려받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내 신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발 한 짝이 없었다. 붐비는 인파에 쓸려 다니던 통에 벗겨진 모양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온 낯선 도시에 한쪽 신발만 신고 서 있는 소년을 상상해보라. 나는 엘에이 기어 농구화 한 짝을 찾기 위해 공연이 끝난 운동장 바닥을 엉엉 울면서 돌아다녔다.

결국 찾지 못했다. 한쪽 신발만 신고 절뚝거리며 멀고 먼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신발은 잃어버렸지만 대신 꿈을 들고 왔다. 티파니 누나의 공연처럼 환상적인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내가 만든 무대에 티파니가 선다면 어떨까?

놀랍게도 꿈은 이루어졌다. <에스비에스>(SBS)에 피디로 입사해 수십번의 공개방송을 연출했으니. 심지어 내가 만든 무대에 티파니가 선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못 믿겠다고? 소녀시대의 티파니도 티파니라고 우겨본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정말로 마주칠 수 있을지.

이 글을 읽는 ‘아재’와 언니들 중에도 그날 콘서트장에 있었던 사람이 있을까? 나처럼 티파니와 데비 깁슨 중에 누가 더 좋은지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까? 그렇다. 이 칼럼은 그런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쓰는 칼럼이다. 그런 기억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서는 뒤늦게라도 티파니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추천곡을 적어본다. 앞에서 말한 빌보드 차트 1위 곡들이 대표곡이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아이 소 힘 스탠딩 데어’. 비틀스의 원곡에서 ‘그녀’(her)를 ‘그’(him)로 바꿔 리메이크했다.

에스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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