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1공화국>은 1981년 4월 세번째 이야기에서 해방정국 북한 정치사를 정면으로 다뤄 또 한번 안팎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지도자 조만식(박종관·왼쪽 사진)은 물론이고 김일성(국정환·오른쪽 사진)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가들, 그리고 소련군정 지도자들의 이름과 모습은 사실상 해방 36년 만에 처음으로 공중파에 등장한 셈이었다. 문화방송 제공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 김일성은 누구인가? 김책은? 현준혁은? 이강국은? 박헌영은? 이주하, 오기섭, 최용건, 김수임, 김정숙… 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누구인가?
1981년 <제1공화국> 방송을 기점으로, 해방 이후 36년, 남한 단독정부 이후 33년, 특히 5·16 이후 20년, 우리는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정치 사건은 전혀 알지 못했다.
국내 최초로 정치드라마를 기획하며, 북한 정치사를 알려야 한다는 책무감을 느꼈다. 이 땅의 통일을 대비하는 최소한의 작업이다. 남한 쪽으로는 해방부터 이승만 정권의 붕괴까지의 16년을 그려나갈 계획이었다. 북한은 정권 수립 과정부터 시작하여, 가능하면 남한의 정치사와 병렬로 그려보기로 했다. 바야흐로 역사의 민주시대를 열어가는 기본일 것이다. 1945년의 정치 상황을 되돌아보면 새삼 역사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어쩌면 그때나 2018년 지금이나 달라진 게 무언가? 해방공간, 그 협곡의 시대, 그 첫번째 소재는 ‘조만식과 김일성’(제3화·81년 4월16일 방영)이다.
1945년 8월15일, 고당 조만식(박종관)은 평안남도 강서군 안골에서 농사를 짓다 해방 소식을 듣는다. 그의 나이 63살. 곧이어 조만식은 조선공산당 평남준비위원장에 추대된다. 조선공산당의 방침으로 첫번째 좌우합작을 천명하고 부위원장에 오윤선(박인환) 장로를 선임한다. 그리고 현준혁(김기일)을 만난다. 남쪽에서 활동 중인 박헌영(홍성민)의 소식을 접한다.
45년 8월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다. 치스차코프 소련군 사령관은 도착 즉시 성명을 발표한다. “조선인민들이여! 조선에서의 행복은 당신들의 몫입니다. 붉은 군대의 위력은 크고도 큽니다. 소련 군대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남의 영토를 점령하거나 침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탈린 대원수의 지령입니다. 조선 지역의 영토를 얻으려는 목적은 갖지 않습니다.” 참으로 감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복도, 점령도, 공산주의를 심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평남위원회를 결성하고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십시오.” 이 땅에 태평성대가 열린 듯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 그들은 백주대낮 노상의 약탈자였다. 포획과 아녀자 강간을 자행하였고, 강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완전 이중적이었다. 이즈음 사람들은 노래를 만들어 외우고 다녔다. “미국 믿지 마라! 소련 속지 마라! 일본 일어선다.” 36년간 일제 압제가 끝나고 해방을 맞은 민중들의 정서가 한마디로 읽히는 유행어였다.
<제1공화국>은 그 민중의 정서를 담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부검열에 걸리곤 했다. 북한의 정치 실체를 정면으로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부터 북한은 심한 정치 회오리에 말려들고 있었다. 로마넨코 민정부의 ‘정치요리’가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 작업이 ‘김일성 장군의 귀환’ 예고다. 국민들은 노장군 김일성의 귀환에 기대가 크다. 이승만, 김구, 김일성으로 이어지는 원로 정치인이 펼쳐나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이 한없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의심이 번져나갔다. 만주의 전설적인 노장군은 20년 전에 죽었다고 소문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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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넨코 소장은 조만식을 비롯한 오윤선, 현준혁 등 북한 원로들을 만찬장에 불러 모으고 김일성(국정환)을 극적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34살의 젊은 김일성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이때부터 반목의 시작이다. 모스크바식 정치는 현란했다. 피켓 시위의 정치가 범람하였다. 여론은 끊임없이 조작되었고, 퍼포먼스의 정치는 화려했다.
그들은 김책(백인철)을 앞세워 조만식 설득 공작에 돌입한다. 통일 정당, 민주주의 정당, 김일성 정당의 산파역을 제안한다. 조만식은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세가지를 주창한다. 그것은 첫째 민족의 독립이요, 둘째는 남북의 통일이요, 셋째는 민주주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실천을 강조했다. 조만식 역을 맡은 박종관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소련군은 좌우합작을 막고, 김일성을 앞세워 백색테러를 자행했다. 백주에 달리던 트럭 위의 현준혁이 암살되고, 옆에 동승한 조만식은 공포에 빠진다. 이날이 45년 9월28일. 그리고 10월14일, 평양에서는 대규모 김일성 환영대회가 열린다.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환영대회. 그것은 흥분을 자아내는 최고의 정치연극, 그 클라이맥스의 대반전이었다. 소련군과 김일성은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 놓는다. 이어서 최용건(김기현), 김책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민주당이 창당되고 김일성을 옹립하기에 이른다.
조만식은 “틀렸시오. 다 틀렸시오” 탄식하며 남북합작을 도모한다. 그는 감금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인편을 대고 편지를 보내며 “이북의 민주운동은 죽어간다. 이북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놔두고 떠날 수 없으니… 나는 여기 남을 테니….” 이승만(최불암)은 편지를 받고 슬퍼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김구(이영후)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며 말했다. “38선! 국경 아닌 국경을 뚫어야 해! 누가 교통을 막는단 말인가!” 뒷날 김구의 남북협상, 월북의 전초이기도 하다.
조만식은 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된다. 이날 이후 하얀 붕대로 머리를 감싼 조만식의 그 의연한 자태를 본 사람이 없다. 김일성의 북한 통치는 현실이 되었다. 68살의 조만식은 대동강변 정보처로 옮겨졌다가 50년 10월15일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제4화 테러’ 편. 반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용광로를 들여다보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김구 “제2의 독립운동을 해야 하느니… 파괴자와 건설자가 한길을 갈 수 있겠는가. 협동되기를 우리가 노력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이 소련이라 생각하니…”, 이승만 “애국심과 조직력을 떨쳐야 하느니…”, 김성수 “한민당이 중심이 되어 반탁대열의 선봉에 서자”, 조선공산당의 김삼룡도 “모든 정치단체가 뭉치자. 물론 공산당도 앞장선다”며 반탁대열에 섰다.
그런데 1946년 벽두, 평양의 김두봉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 방송을 하고 나섰고, 1월5일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에서 박헌영은 “조선의 정치가들은 인민의 혼란을 막기 위해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라며 찬탁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론이 심하게 반발하자 박헌영은 통역의 실수라며 “박헌영의 애국심을 모르는 미국 언론의 악질적 모략이다”라고 변명에 급급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와 언론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런데 드라마의 화제만큼이나 감시와 견제도 심해졌다. <문화방송>의 내부 검열시스템은 복잡·다난하다. 표면적인 심의실의 검열은 기본이고, 몇 단계에 이르는 검색과 삭제. 곳곳의 지적 양상에 따라 외압의 농도를 알 수 있다. 심의가 강화될수록 우리의 자구책도 생겨났다. 20개의 예상 체크포인트를 만들어놓고 10개만 삭제되면 성공이다. 끝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도 숨겨둔다. 나중엔 삭제된 장면이나 대사가 어떤 것인 줄 시청자가 유추하게 하기도 한다. 음소거, 튀는 편집…, 자해 행위에 가깝지만 시청자와 우리는 암호처럼 통했다. 구멍난 시루에 물 붓는다고 비웃겠지만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란다.
방송과 민주주의 발전의 함수관계를 들여다본다. 민주화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민화와 현혹을 절대 가치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방송을 계몽이 아닌 몽매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헌법 제1조’ 부가조항으로 자국에 대한 비난을 허락하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일본의 정치사회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은 <엔에이치케이>(NHK) 탓도 크다. 미군정이 들어서며 발빠르게 이 땅에 진주한 기업이 있다. 미국의 전기회사 웨스팅하우스다. 이로써 이 땅의 방송은 시스템부터가 미국식이 되었다. 만약 그때 유럽 방식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에 와서 영국의 <비비시>(BBC)를 부러워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나쁜 방송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란 성숙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성숙한 인간의 사회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반탁과 찬탁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시기. 반탁 데모에서 유혈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학병동맹은 정동교회 집회 이후 가두진출, 구보대열은 찬탁 주장의 좌익계 인민보사를 급습해 기물을 파괴하는 소동을 벌이고 달아난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진압 작전에 나선다. 46년 1월19일 밤. 학병동맹 아지트를 포위하고 밤새워 대치하다가 새벽녘 장택상은 발포명령을 내린다. 피가 피를 부르는 싸움. 3시간 이상의 총격전 끝에 전원 항복을 받아내고 구금된다. 이 사건으로 민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김무생)과 장택상(이정길) 사이에 작은 갈등이 싹튼다. 훈계방침의 장택상과 기소방침의 조병옥의 갈등과 논쟁은 하지 군정 사령관의 개입으로 기소로 방향이 잡히고 만다.
그 직후 터진 ‘조선정판사 사건’은 테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공산당은 위조지폐와 어음을 살포한다. 공산주의 이론가 이강국(현석)과 아름다운 연인 김수임(정애리), 한 맺힌 저주와 투쟁의 핏물만 튀기는 해방공간에서 그래도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 심취해 있고, 엘리엇의 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려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 밀행 장면은 이른바 ‘안기부 사건’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 국면을 톱라이트로 처리한 연극적 장면은 압권이었다. 실제 이승만과 김구가 대좌한 순간은 해방 이후 대여섯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수십번 맞붙어 언쟁을 벌인다. 그것은 픽션이 아니라 각자 따로 피력했던 의견, 기자회견, 강연회, 신문기사 등에서 발췌하고 확대해 드라마의 틀 속에 넣어 재정리한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의 ‘정치적 상상력’인 것이다. 이 부분의 독보적 극작술을 가진 사람이 김기팔 작가다.
이승만과 김구.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이상 통일정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그렇다면 ‘남한 단독만이라도 하루빨리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승만의 생각이라면, ‘통일정부 수립은 국민의 여망이요, 나라를 갈라놓는 단정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비극이기 때문에, 어떤 방도를 쓰더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김구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읍 발언’부터 치밀하게 추진한 단독정부 수립이 유엔의 자유총선 결의로 구체화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는 길목에 들어선다.
김구는 김일성과의 평양회담을 강행하면서까지 48년의 5·10 총선거를 막으려 했고, 선거 불참은 물론 통일독립촉성회란 새 기구까지 발족시켰다. 이승만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요 경륜가였으며, 그 때문에 그는 변통을 통용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김구는 혁명가에 가까웠고, 시종 원칙에 철저했다. 그리고 49년 6월26일 끝내 김구는 이승만의 사주로 암살당한다. 그리부터 1년 뒤 6·25가 터진다.
1981년에 그린 1945년의 이야기가 73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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