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방송·연예

요즘 감성 없는 ‘요즘 아이들의 옛날 가요제’

등록 2020-10-09 16:52수정 2020-10-10 02:33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추석 맛보기 예능프로그램인 줄 알았던 <전교톱10>(한국방송2)이 어느새 정규편성 돼 2회가 방송됐다. <전교톱10>은 과거 <가요톱10>의 순위 곡을 10대들이 부르는 경연프로그램이다. 전국에서 2000명의 청소년이 지원해 본선 진출자를 가렸고, 매주 무대에서 우승자를 뽑아 왕중왕전을 펼칠 기획이다. 첫 회에는 1995년 5월 넷째 주 노래를, 2회에는 1996년 4월 넷째 주 노래를 불렀다. 왜 하필 그때 노래를 10대들이 불러야 할까? 이는 유튜브에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가요 프로그램을 재생하는 콘텐츠가 대박 난 것과 관련이 있다. <어게인 가요톱10>으로 재미를 본 한국방송(KBS)이 <가요톱10>의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해 지상파용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명분도 있다. 사회자가 강조하듯, 1990년대는 ‘가요의 전성시대’였으니까. 서태지의 등장 이후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대형 기획사가 주도하는 케이(K)팝 시장이 본격화하기 전이라 싱어송라이터의 다채롭고 실험적인 노래들이 백가쟁명을 이뤘다. 그때의 ‘명곡’을 10대들이 불러서 세대 공감을 일으키겠다는 취지인데, 시청자들에게도 통했는지 호평 일색이다. 하기야 청소년 참가자들은 시청자에게 응원하고픈 마음을 부르기 마련이고, 복고는 힘이 세서 ‘추억 팔이’라는 힐난 속에서도 늘 선전하지 않던가. 훈훈한 분위기에 재를 뿌리고 싶진 않지만, 민망함이 솟구친다. <전교톱10>은 경연프로그램의 측면에서 봐도 안이하기 짝이 없고, 복고 콘셉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구리고 강압적이다.

한때 서바이벌 오디션이 홍수를 이룬 적이 있었다. <슈퍼스타케이> <케이팝스타>를 거쳐 <프로듀스 101>과 <아이돌 학교>에 이르기까지. 열기가 과열되고 상업성이 노골화되면서, 출연자들의 열정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의 열정까지 착취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투표 조작, 참가자 학대 등이 밝혀지고, 형사 사건으로 매조지면서 굿판은 끝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수확은 있었다. 경연프로그램이 그저 참가자의 가창력이 아니라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발전시킬 잠재력과 개성을 기준으로 선발하고, 편곡·협연·코칭·멘토링 등 전문적인 지도를 통해 역량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높아진 눈높이에 비해 <전교톱10>의 경연 방식은 놀랍도록 진부하다. 10대들의 ‘재해석’ 운운하지만, 적절한 편곡이 따라주지 않는다. ‘요즘 감성’을 입힐 여지는 적고, 중년 세대가 대다수인 심사위원의 정서에 맞출 수밖에 없다. 이상민은 자기 전성기 회고에 푹 빠져 있고, 김형석은 참가자들을 후배 뮤지션으로 대하기보다 대놓고 ‘귀여워’한다. 그럼 이게 뭔가. 원곡 가수 앞에서 젊은 가수들이 노래하며 오마주를 바치는 <불후의 명곡>의 열등재이거나 재롱잔치가 되고 만다. 참가자들이 중심이 된 무대의 긴장과 재미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경연이 서바이벌 오디션처럼 눈물 짜는 긴장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처럼 한 무대에서 보기 힘든 이영지, 슬릭, 효연의 공연을 보여주고, 승자에게는 마음껏 상금을 낭비하는 ‘플렉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 혹은 <올인>처럼 자고로 가장 쫄깃한 놀이인 도박의 규칙을 적용해 경연을 노름처럼 즐기게 할 수도 있다. 노래 실력 외에 베팅 전략과 운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기든 지든 ‘짠내’가 아닌 호기가 느껴진다. <전교톱10>에 비해 얼마나 신선하고 세련된 기획인가.

복고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전교톱10>은 지나친 ‘세대 부심’과 강압성이 느껴진다. 영화 <건축학 개론>,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예능 <투유 프로젝트―슈가맨> 등에 이어 최근의 <놀면 뭐하니> ‘싹쓰리’까지, 1990년대 대중문화를 추억하는 콘텐츠가 계속 만들어진다. 1990년대는 1980년대 경제성장 및 민주화운동의 성과가 대중문화의 만개로 이어진 ‘벨 에포크’의 시기이자, 외환위기로 삶의 불안정성이 전면화하기 전의 여유와 낭만이 넘쳤던 시기니까. 지금 40대가 된 엑스(X)세대가 자신의 청춘을 호시절로 추억하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윗세대가 <가요무대> <열린 음악회>를 보며 그윽해하듯, 엑스세대도 자신들의 추억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문제는 <전교톱10>이 동년배의 향수라기보다 엑스세대의 ‘갑질’로 보인다는 점이다. 부모 세대가 20대 때 즐겼던 노래를 자식 세대에게 부르게 하며, 당시의 창법과 정서를 충실히 재현할수록 인정과 기회를 주는 경연에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586세대가 정치의 장에서 그러하듯, 엑스세대가 대중문화의 장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험구인가. 만약 1995년에 중년들이 25년 전 유행하던 ‘소양강 처녀’, ‘아씨’ 등을 10대들에게 부르게 하는 경연을 벌였다면, 당시의 엑스세대는 어떤 조롱을 퍼부었을까.

젊은이들은 자기 세대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 나름의 복고를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명 특급>의 ‘숨어 듣는 명곡’은 재재로 대표되는 2030세대가 주체가 돼 10년 전 즐겼던 아이돌 음악을 추억하고 성찰한다. 숨어 들을 만큼 부끄러운 가사의 노래들이지만, 그 부끄러움을 공유하고 달라진 현재와 소통하면서 그 노래를 즐기던 자신들의 서사를 향유하는 것이다.

어째서 아직 늙지도 않은 엑스세대가 문화권력에 도취돼 노욕과 주책을 부리는 걸까. 586세대의 ‘세대 부심’과 ‘내로남불’이 바로 아래 세대로 전이돼 가는 것은 아닌지, 지레 아찔하다.

대중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쓰레기’ ‘좋아’ ‘개자식들’…2만5천권 독서가 스탈린의 책읽기 1.

‘쓰레기’ ‘좋아’ ‘개자식들’…2만5천권 독서가 스탈린의 책읽기

국립미술관과 회고전시 갈등 빚은 김구림 작가 “한국 떠나겠다” 2.

국립미술관과 회고전시 갈등 빚은 김구림 작가 “한국 떠나겠다”

원작보다 섬뜩한 연상호판 ‘기생수’, 기생생물은 볼 만한데… 3.

원작보다 섬뜩한 연상호판 ‘기생수’, 기생생물은 볼 만한데…

‘성평등 도서’ 공격에 맞서 더 다양하게 더 빨간책 [책&생각] 4.

‘성평등 도서’ 공격에 맞서 더 다양하게 더 빨간책 [책&생각]

하버드생 재벌 사위, ‘눈물의 여왕’서 동그랑땡 굽는다 5.

하버드생 재벌 사위, ‘눈물의 여왕’서 동그랑땡 굽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