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황제 윌리엄스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킹 리차드>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겸손하라. 네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다 너의 것이 아니다. 감사하라. 세상은 감사하는 자의 것이다. 삶을 멀리 봐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막노동꾼, 헬스트레이너, 시설관리인 등 ‘투잡’ ‘스리잡’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아버지의 말을 아들은 허투루 듣지 않았다. 실력도, 기술도, 사람 됨됨이도 모두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아버지의 믿음은, 아들을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아시아 선수로서는 역대 최초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공식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손흥민과 그의 아버지 손웅정씨 이야기다.
24일 개봉하는 <킹 리차드>는, 위대한 스포츠 스타를 길러낸 위대한 부모들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영화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세계 여자 테니스계를 제패한 비너스·서리나 윌리엄스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아버지 리처드 윌리엄스(윌 스미스)가 딸들에게 강조한 것도 손씨와 다르지 않았다. 연출을 맡은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감독은 테니스 황제 윌리엄스 자매에게 향했던 기존의 스포트라이트 대신, 리처드가 어떻게 딸들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는지 그 과정에 주목했다.
테니스 황제 윌리엄스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킹 리차드>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비너스(사니야 시드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78쪽에 달하는 챔피언 육성 계획을 세웠던 리처드는, 범죄와 마약으로 찌든 빈민가를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상가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며 동네 허름한 테니스 코트에서 매일 아이들과 연습하는 이유다. 인종차별 속에서 자란 리처드는 아이들에게 ‘계획 없는 삶엔 실패만 있을 뿐’이라고 복창시키며 빗속에서도 스파르타식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1990년대 초, 백인 위주의 귀족 스포츠였던 테니스계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도 받지만, 자매를 테니스 선수로 키워내겠다는 리처드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딸들을 희롱하는 동네 건달들을 제지하다 이들로부터 몰매를 맞는 수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이들의 실력이 늘수록 전문적 트레이닝을 받아야하는데, 자신의 벌이로는 레슨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걱정이다. 아이들의 프로필을 책자로 만들어 유명 코치들에게 ‘미래의 챔피언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막무가내식 요청에 자매들의 실력을 테스트하게 된 한 코치는, 비너스에게 무료 레슨을 약속한다. 코치를 구하지 못한 동생 서리나(데미 싱글턴)는 엄마와 연습하며 꿈을 키운다.
테니스 황제 윌리엄스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킹 리차드>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후 테니스 유망주로 승승장구하는 비너스를 두고 코치는 주니어 선수권대회 출전 등으로 전적을 쌓아 프로 무대에 진출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경기에 나가지 않고 기량을 더 쌓은 뒤 곧장 프로로 데뷔하는 길을 고집한다. 자신감이 넘쳤던 비너스는 이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어느새 갈등은 커져만 간다. 리처드는 사실 그토록 챔피언을 바랐지만, 결과를 위해 과정을 잃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딸들이 승리에 도취해 겸손함을 잃지 않길 바라고, 상대 선수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오는 27일(현지시각)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평단의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윌 스미스의 빼거나 보탤 것 없는 명불허전의 연기로도 눈길을 끈다. 자매를 연기한 두 배우는 테니스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던 탓에 주 5회 고된 훈련을 받은 뒤 실감 나는 경기 장면을 완성했다. 특히 왼손잡이인 시드니는 오른손잡이인 비너스를 연기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테니스 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2017년 1월, 자매 대결로 펼쳐진 호주 오픈 여자단식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동생 서리나 윌리엄스(오른쪽)와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는 경기가 끝난 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는 소감으로 더 큰 감동을 자아냈다. 멜버른/AP 연합뉴스
배우들에게 직접 테니스 자세를 가르쳤다는 윌리엄스 자매는 테니스계의 살아있는 신화다. 비너스와 서리나 각각 4대 메이저 대회 여자 단식에서 7번과 15번 우승했다. 2001년 유에스(US) 오픈과 2009년 윔블던 등 4대 메이저 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만 7차례 만난 맞수이기도 하다. 함께 여자 복식 팀을 이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13차례 우승을 차지하기도 한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흑인들을 위한 기부와 봉사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