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세상에선 히어로가 인기다. 절대적 선의와 막중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100% 절대 선도, 100% 절대 악도 없다. 누구나 선과 악이 뒤섞인 복합적 내면을 지닌다. 그런 현실이 투영된 걸까.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한, 영웅답지 않은 영웅, 안티히어로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거세지고 있다.
30일 개봉한 <모비우스>는 또 하나의 안티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스파이더맨 영상화 판권을 소유한 소니픽쳐스가 마블과 협업해 만들었다. 마블은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인 1980년대에 경영난 해소를 위해 자사 만화 캐릭터 스파이더맨의 영상화 판권을 다른 영화사에 팔았다. 그 판권이 흘러 흘러 소니에 들어갔다. <아이언맨>(2008)으로 시작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처음부터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 이르러서야 소니와 마블이 전략적으로 손잡으면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엠시유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시작했다.
소니는 마블과 함께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2019),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등 스파이더맨 솔로 무비를 만드는 한편, 스파이더맨 세계관 속 빌런(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2편까지 개봉한 <베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번에 또 한편의 안티히어로 영화를 내놓았다. 원작 만화에서 스파이더맨에 맞선 적수 마이클 모비우스 박사를 새로운 스핀오프 시리즈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이다.
모비우스(자레드 레토)는 어릴 때부터 희귀 혈액병을 앓아왔다. 목발 없인 제대로 걷지 못하고, 수명도 남들보다 짧다. 모비우스는 뛰어난 지능 덕에 생화학자가 되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약 개발에 몰두한다. 흡혈박쥐의 디엔에이(DNA)를 인체에 결합하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자신의 몸에 임상실험을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건강한 육체와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지만, 흡혈을 하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같은 병을 앓으며 친구가 된 마일로(맷 스미스)도 치료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부작용을 아는 모비우스가 극구 말리는데도 마일로는 몰래 치료제를 자신에게 투여한다. 동물적 본능에 눈을 뜬 마일로는 사람들을 해치며 흡혈을 하고, 모비우스는 이를 막고자 친구와의 결전에 나선다.
모비우스에겐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 같은 건 없다. 그저 희귀병에 시달려온 자신과 친구를 위해 연구를 해왔다. 의도치 않게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 그는 동물적 본능을 통제하지 못해 살인까지 저지른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영화를 연출한 다니엘 에스피노사 감독은 “마이클 모비우스는 마블 유니버스에서 가장 이타적인 캐릭터 중 하나다.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괴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모비우스는 치료제 투약 이후 사람과 박쥐를 닮은 괴물 형상을 오간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과 스피드뿐 아니라, 박쥐의 비행 능력과 주변 음향 정보를 활용해 공간 내 물건들을 파악하는 반향 위치 측정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잔영을 남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화려하고 감각적으로 담아낸 영상과 박쥐의 감각으로 느끼는 음향 효과는, 커다란 스크린과 빵빵한 음향 시스템을 갖춘 극장에 가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다.
<모비우스>는 기존 마블 영화들과 달리 시종일관 어둡고 묵직하다. 앞서 나온 스파이더맨 세계관의 안티히어로 영화 <베놈>이 원작과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유머를 구사해 아쉬운 평가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찌 보면 디시(DC) 영화에 가깝다. 인간과 괴물,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 자레드 레토가 앞서 디시 안티히어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조커를 연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4),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하우스 오브 구찌>(2022) 등 작품마다 파격적인 변신을 거듭한 자레드 레토는 이번에 더없이 잘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
자레드 레토는 지난 24일 온라인으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모비우스 캐릭터와 관련해 “선과 악 사이 회색지대에 있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관객들도 이제는 전형적인 마블 히어로 말고, 빌런도 아니고 히어로도 아닌, 중간지대에 있는 히어로를 만날 준비가 돼있다. 저에겐 완벽한 캐릭터였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안티히어로의 복잡한 면이 흥미롭다. 누구도 100% 착한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악한 면을 갖고 있다. 그런 세심한 면까지 드러내는 게 연기자로서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나면 두개의 쿠키 영상이 나온다. <베놈>의 쿠키 영상처럼 스파이더맨 관련 내용도 언급된다. 일각에선 베놈, 모비우스, 스파이더맨이 함께 나오는 영화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멀티버스 개념을 도입하면서 역대 스파이더맨이 한자리에 모인 바 있기에, 또 다른 시공간에서 스파이더맨과 베놈, 모비우스가 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블 히어로 가운데 특히 인기가 높은 스파이더맨의 팬들로선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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