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인 임재춘씨는 촛불문화제 때 ‘시 읽어주는 남자’를 맡았고, 이들이 출연한 연극 <햄릿>에서 오필리어 역할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어요. 농성장에서 재춘씨는 인기가 많았어요. ‘기승전임재춘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이수정 감독)
“대단한 감독님 만나서 이렇게 영화에도 나오고 영광이죠. 영화 보고 나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투쟁할 때는 젊었는데 마지막 단식농성 장면 보니까 제 머리가 너무 하얘서 짠하더라고요.(웃음) 당시에 처량하게 보이려고 염색도 안 했거든요.”(임재춘씨)
지난달 29일 만난 영화 <재춘언니>(지난달 31일 개봉)의 이수정(59) 감독과 주인공 임재춘(60)씨는 마치 오누이 같았다. 아니,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모습이 오누이보다는 자매에 가까웠다. 임씨가 남자인데도 왜 영화 제목이 <재춘언니>인지 알 듯했다. 이날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이 감독은 대면으로, 대전에 사는 임씨는 생업에 바빠 화상으로 참여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씨지브이(CGV)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다큐영화 <재춘언니>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이수정 감독(왼쪽)과 주인공 임재춘씨. 시네마달 제공
<재춘언니>는 2007년 해고를 시작으로 2019년 협상 타결까지 국내 최장기 정리해고 사업장이었던 기타 제조회사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한 ‘희망버스’ 시위를 그린 다큐 <깔깔깔 희망버스>로 2012년 데뷔한 이 감독은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2011년 밴드를 만들어 공연했는데, 자신들이 만들었지만 다루지는 못한 기타를 해고된 뒤에 무기로 쓴다는 게 재밌게 느껴졌다”고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촬영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8년 동안 했어요. ‘남은 자들의 노래’라는 가제의 기획이었죠. 2020년 편집본을 보니 여러 사람이 나오는 탓에 구분도 안 되고, 많은 시간을 다 담다 보니 따라가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재춘언니 한 사람으로 단순하고 쉽게 가자’고 맘먹은 이유죠. 이후 편집·구성이 쉬워졌어요.”
결과적으로 배려심에 정 많은 ‘언니’ 캐릭터 임재춘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 것은 이 영화를 남다르게 만든 한 계기였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임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7년 콜텍에 입사한 최고참 노동자였다. 영화 속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정겹게 구사하는 그는, 농성장에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 사람들을 먹였다. 연극 무대에서 우스꽝스러운 의상과 ‘발연기’로 사람들을 웃기고, 글쓰기를 힘겨워하면서도 노동자를 외면한 사법부를 점쟁이에 빗대 풍자시를 쓴 것도 그였다. 농성장에서 니체의 책을 함께 읽고, 밴드에서 상자 모양의 악기 ‘카혼’을 두드렸던 그 시간은 임씨에게 어떻게 남아 있을까?
“신기했죠. 기타 칠 줄도 몰랐는데, 밴드를 해보니 기타가 즐거움을 주니까 ‘이런 걸 우리는 왜 못 배웠을까’ 싶었죠.(웃음) 글도 써보고, 연극도 해보고, 당시를 생각하면 사람이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좋겠지요.”
<재춘언니>의 또 다른 새로움은 ‘죽는 것 빼곤 다 해봤다’는 장기해고노동자의 고난을 무겁지 않게 다뤘다는 점이다. “악다구니 쓰는 것 말고도, 노래하고 놀고 연극하는 것도 투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농성장은 밖에서 보면 처절한 곳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놀라운 코뮌(공동체)이거든요. 결국 연대해서 살다 보면 못 견딜 시간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이 감독이 말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을 낭만화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흑백 화면은 그 어떤 아름다움도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리는 해고의 근본적 고통을 은유한다.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한 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는 두 딸의 바람에도 농성장을 떠나지 못한 임씨는, 2019년 봄 42일간의 단식농성을 벌인 끝에 회사로부터 정리해고에 대한 유감 표명과 명예복직, 조합원 25명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의 타결을 이끌어냈다. “더 이상 할 게 없는 거예요. 말주변도 없고 하니 단식이라도 하자 한 거죠. 못 버틸 줄 알았는데 버텨지더라고요.(웃음) 봄이라 사람들도 찾아오고, 농성장 부근 공원에 산책 다니고. 그 시간이 좋았죠.”
투쟁은 끝나고 동지들은 흩어졌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임씨는 옛 동료들과 다시 모여 밴드 연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 감독은 “<재춘언니> 지브이(GV·관객과의 대화)가 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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