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기타 기능공 임재춘. 콜트·콜텍 노동자 복직 투쟁에서 끝까지 남아 싸운 그는 불의엔 핏대를 세웠지만 농성장에선 마음 살뜰한 동료였다. 시네마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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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언니>(2020)는 얼굴의 다큐멘터리다. 스크린 위로 선연하니 떠오르는 임재춘의 얼굴은 여러 차례 관객의 심장을 찢어놓는다. 4644일, 다큐가 기록한 임재춘의 시간은 그 찢긴 심장에 씨앗을 심기도 하고 눈물을 뿌리기도 한다. 그렇게 씨앗과 눈물과 시간이 만나 작품의 끝에 다다르면 심장에서 무엇인가가 싹튼다.
이수정 감독은 2011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희망버스를 기록한 <깔깔깔 희망버스>(2012)를 연출했다. <재춘언니>와 <깔깔깔 희망버스>는 서로 다른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지만, 주제의식에서는 서로 닮았다. 두 작품 모두 카메라를 든 개인적인 존재가 공적인 이슈가 펼쳐지는 장 속으로 들어가 그 두 영역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이를 통해 사실 사적인 것과 정치적이란 것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깔깔깔 희망버스>는 “나는 왜 그 버스에 탔을까. 김진숙 지도위원이 보고 싶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미안해하는 마음들의 실체도 궁금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서는 내레이터 본인이었다. 그는 <재춘언니>에서도 때때로 카메라 뒤에 있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관객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관객에게 권한다. 임재춘을 만나보라고, 그러면 당신도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재춘언니’ 임재춘은 누구일까? 그는 콜텍 기타 공장에서 30년 동안 기타를 만들어온 기능공이었다. 하지만 2007년 회사로부터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는다. 잘 알려져 있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의 시작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 소송을 걸고 싸움을 이어간다. 애초에 법원은 해고가 부당했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2012년 대법원은 사뭇 다른 결론을 내린다.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경영상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세계 기타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콜트·콜텍을 생각하면 영 어색한 판결이다.
임재춘은 이 “최악의 무속(巫俗) 판결” 앞에서 ‘서초동 점집’이라는 시를 썼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대로 이백십육. 그곳에는 장미넝쿨로 둘러싸인 점집이 하나있네. 그곳의 간판엔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있네. 열네 명의 검은 망토 점쟁이가 요상하게 점을 치네 (…)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신 내린 무당인가,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개떡 같은 법원이다.” 이 시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콜밴’ 밴드의 노래 가사가 되었다. 이후 이 ‘무속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부의 재판 거래 결과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게 13년 동안,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지난한 복직 투쟁이 이어졌다. 말이 13년이지, “나의 역사는 기타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직장도 없이, 가족들의 원망을 견디며, 풍찬노숙을 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이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연대하는 시민들과 함께 노래하고, 연극을 올리고, 책을 낭독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동지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세 명의 노동자가 끝까지 남아 싸웠고 2019년 마침내 사측과 합의를 보게 된다. 그 마지막 고비를 넘어갈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은 임재춘의 42일간의 단식농성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기타 기능공 임재춘. 콜트·콜텍 노동자 복직 투쟁에서 끝까지 남아 싸운 그는 불의엔 핏대를 세웠지만 농성장에선 마음 살뜰한 동료였다. 시네마달 제공
하지만 이런 묘사가 “임재춘은 누구인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임재춘은 수줍음이 많지만 무대 위에서는 당당해지고, 매사에 조심스럽지만 불의 앞에서는 기꺼이 핏대를 세우며, 농성장의 사람들을 위해 빗자루질을 하고 밥을 짓는 사람이다. 그래서 농성장에서 사람들은 그를 ‘재춘 언니’라고 불렀다.
그는 2021년 최고의 개봉작 중 한편이었던 <휴가>(2020, 이란희)의 주인공인 재복(이봉하)의 모델이기도 하다. 가구공장에서 기능공으로 일하다 부당해고를 당한 재복은 동료들과 함께 길거리에 천막농성장을 세워놓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수년째 복직 투쟁 중이다. 오랜 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데다 재판까지 패소한 상황에서 재복은 열흘의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간다. 농성장에서도 음식을 하고 동료들을 살뜰히 보살폈던 재복은 집에 돌아와서도 딸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가사를 돌본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노동자 남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란희 감독은 이 작품에서 “남성 노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는데, 이런 노력은 임재춘이라는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핍진성을 얻는다.
<휴가>와 <재춘언니>는 한편으로 김일란·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2018)을 떠오르게 한다. <공동정범>은 2009년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생존자들의 참사 이후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후회와 원망, 분노와 죄책감, 외로움과 회한 등 복잡한 마음속에서 부대끼는 남성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덕분에 우리는 투사의 이미지 이면에 놓여 있는 다양한 ‘남성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 작품은 한국 남성 영화의 새로운 계보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집스럽게 흑백 화면을 고수하면서 오롯이 임재춘의 얼굴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던 다큐는 그 마지막에 이르러 컬러로 전환된다. 비로소 색을 가진 임재춘은 사측과의 합의 후 투쟁을 마무리하고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평생을 기타 기능공으로 살았지만, 그 삶은 이제 끝났다.
위태롭게 비계(飛階)를 타고 오르는 임재춘의 ‘지금’은 한국 사회가 도달한 노동 현실이기도 하다. 그건 좌절일까? 실패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속단하기는 어렵다. 임재춘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노동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컬러 속에서 멈추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임재춘과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13년이 뿌린 씨앗이 무엇을 틔우게 될지는 결국, 우리의 심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