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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보호받길 원하지 않는 여자들의 목소리

등록 2022-10-09 08:00수정 2022-10-09 10:11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애프터 미투
영화 <애프터 미투>중 ‘이후의 시간’의 한 장면
영화 <애프터 미투>중 ‘이후의 시간’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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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 4명의 감독은 각자가 연출한 네 편의 단편을 때로는 박음질하고 때로는 공그르기를 해서 한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엮어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먼 미래로 나아간다. 흐르는 여자들의 시간과 그 시간을 채우고 있는 여자들의 마음. 내가 다큐 <애프터 미투>에서 읽은 모든 것은 이 두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떻게 그토록 용감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에피소드인 ‘여고괴담’에서 박소현 감독은 용화여고 스쿨미투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용화여고는 전국적으로 펼쳐진 스쿨미투 운동에 불을 붙였고, 학생들은 곳곳에서 성폭력을 포함한 위력에 의한 폭력을 고발하고 생활지도에서 성차별적 급훈에 이르기까지 학교 시스템에 촘촘하게 뿌리박고 있는 가부장제 문화를 비판했다.
영화 &lt;애프터 미투&gt; 중 ‘여고괴담’의 한 장면
영화 <애프터 미투> 중 ‘여고괴담’의 한 장면

‘여고괴담’의 감정은 두려움에서 시작해서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그 선생님한테는 잘 보이지도 말고 못 보이지도 말고, 그냥 안 보이는 것이 좋아.”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온 이 말은 여자들로 하여금 존재하되 보이지 않게 만들어온 유구한 폭력의 역사가 어떻게 학교를 괴담의 세계로 만들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여자들은 이 말을 통해 “교훈”을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마침내 #미투가 시작되었다. 나도 말하겠다는 용기가 터져나오자, 너와 함께하겠다는 #위드유가 등장했다. 운동이 뜨거웠던 건 폭력을 묵인해왔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의심 끝에 괴담이 아닌 사실들에 고개를 든” 이들이었고, 잠들었던 태양을 깨우고 밤을 낮으로 바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용감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생활기록부를 쥔 채로 미래를 망쳐주겠다고 엄포를 놓는 학교의 권위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 이솜이 감독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보이지 말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끝내 자신을 드러낸 박정순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경험을 통해 여자들을 용감하게 만든 공통의 기억, 공통의 감각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했던 박정순은 그 경험이 삶에 남긴 상처 속에서도 “살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써온” 사람이다. 그는 하루에 100번씩 손으로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라는 문구를 쓴다. 이건 일종의 자기 치유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살면서 한번도 피해 경험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박정순은 드디어 용기를 내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챙겨 폭력의 기억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를 하기 위해서다.

다시 찾은 고향 땅은 마치 박정순의 마음의 풍광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황량하고 차갑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정순이 관객에게 꺼내놓는 마음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박정순의 애칭인 ‘행복’에의 열망에 가깝다. 마이크를 쥐고 박정순은 말한다. “나는 아픈 내 마음을 용서할 거야. (…) 나는 많이 다친 나를 용서할 거야.” 행복이란 슬픔과 분노, 원망처럼 오래도록 지속되는 감정 안에서 용감한 자만이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찰나와도 같은 해방임을, ‘행복’의 말하기와 함께 오래도록 곱씹게 된다.

가해자가 별일 없었다는 듯 현장으로 돌아오고, 어제처럼 오늘도 여자가 죽는 지금. 모든 것이 다 무용한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세상은 조금씩 어디론가 나아간다. ‘이후의 시간’을 연출한 강유가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의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말을 인용했다. “세기 단위로 생각하면 시간의 감각이 달라진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자들의 역사를 찬찬히 따라가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의 시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가 “낭만화시켜왔던 폭력”과 싸운 사람들을 만난다.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연대 활동가이자 아티스트 진희,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던 감독 남순아, 그리고 성평등 교육 활동가이자 마임 배우인 이산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구조적인 폭력에 저항했던 이들이다.

이 에피소드를 추동하는 마음은 책임감과 자긍심이다. 그들은 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순간에 머물지 않고 ‘이후의 시간’에 정성을 들였다. 그렇게 “현장의 인식을 바꾸는” 교육 영역에 힘쓰고, 법적이고 정책적인 변화를 견인할 수 있었던 건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책임감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자긍심이 필요하다. 그게 결국 내가 지금 잠시 쉬더라도 나의 동료가 나를 이어 계속 싸워줄 거라는 믿음의 바탕이기도 할 터다.

영화 &lt;애프터 미투&gt;의 한 장면
영화 <애프터 미투>의 한 장면

더 나은 논쟁을 가로막는 현실에서도

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는 섹스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여성을 쉬이 도구화하고 섹스를 음경 중심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 이성애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때때로 난감한 문제가 된다. ‘그레이 섹스’는 #미투운동이 벼려낸 피해와 가해라는 언어가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회색지대로 쑤욱 들어간다. 그건 연애였을까, 사랑이었을까, 폭력이었을까, 혹은… 범죄였을까. <애프터 미투>가 우리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건 여기에서다. 회색지대를 다룰 수 있는 언어를 우리가 개발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더 나은 논쟁”을 가로막는다. <애프터 미투>가 개봉하던 날 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안을 발표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여자를 더 잘 보호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보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스스로 싸우고 있다. 왜 국가는, 혹은 국민의 대리자는, 두려움도, 죄책감도, 책임감도 가지지 못하는가. 무엇보다 왜 국가 구성원의 진실한 행복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가.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난감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선 <애프터 미투>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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