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어떤 사과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하는 사과에 어떤 진정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소년들’ 시사회 직후 정지영 감독은 사건 당시 주임 검사가 지난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것을 에필로그에 넣을 생각은 없었냐는 질문에 칼같이 답했다. 정 감독의 이 대답에 이 영화의 존재 이유가, 정 감독이 ‘소년들’을 만든 목적이 있다. 무고한 열아홉, 스무살의 청년들을 17년간 지옥으로 밀어 넣은 공권력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내뱉은 사과는, 연민어린 시선은 얼마나 공허하고 쓸모없는 것인가.
‘부러진 화살’(2012) ‘블랙머니’(2019)에서 실화 사건을 소재로 법조계, ‘모피아’ 등 국가 권력을 직설적으로 비판해온 정 감독이 이번에는 2016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을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이번에도 그의 카메라는 경찰과 검찰 권력을 정조준하고 있다.
전북 완주의 작은 가게에 3인조 강도가 든다. 금품을 훔치는 동안 테이프로 입을 막았던 주인 할머니가 질식사하자 경찰은 어울려 다니던 동네 소년 3명을 강도치사죄로 잡아넣는다. 사건을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미친 개’라는 별명을 가진 황준철(설경구)은 완주경찰서 부임 직후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제보를 듣고 진범을 잡아오지만 이미 사건을 종결한 전임 담당 형사와 검사는 묵살한다.
영화 ‘소년들’은 실제 사건이 벌어진 1999년과 재수사가 이뤄진 2000년, 재심이 진행된 2016년을 오가며 사건의 진실을 맞춰나간다. 여기서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은 2000년 재수사 과정이다. 설경구가 연기한 황준철 반장은 허구의 인물이다. 사회 비판적 이슈를 다루며 ‘한국의 켄 로치’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대중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던 정 감독이 극적 장치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가 황준철이다.
실제 사건의 진실은 영화보다 더 잔인하다 못해 황당무계했다. 1999년 부산에서 진범이 잡혀 전주지검에 송치됐지만 전주지검은 이들을 무혐의로 풀어줬다. 한참 뒤 죄책감을 느낀 진범이 제발로 나타나 누명을 쓴 3명에 대한 구명 운동을 벌이면서야 비로소 진실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인권보다 위신이 더 중요한 공권력의 야만성이 영화적 설득력을 갖기 힘들어 현실보다 덜 극적인 장치를 만들어 넣은 셈이다.
황준철은 범죄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인 ‘공공의 적’(2002)의 강철중을 떠오르게 한다. 정 감독 역시 강철중의 설경구를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강철중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계속 경찰 역할을 피해왔다는 설경구는 “내 딴에는 이 사건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해보니 이 이야기를 진짜로 알고 있던 게 아니더라”며 “‘소년들’이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소년들’은 나이 들어 “정리된” 강철중을 보여준 설경구를 비롯해, 유준상, 진경, 염혜란, 허성태 등 주·조연 연기 모두에서 좋다거나 앙상블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뛰어넘는 진심이나 열망이 느껴진다. 작은 역을 기꺼이 맡은 조진웅, 박원상, 서인국, 박철민도 마찬가지다. 연출 경력 40년에도 여전히 뜨거운 피가 흐르는 영화를 만드는 정 감독의 의지와 열망에 동참했기 때문일 터다.
이미 알려진 실화를 왜 영화로 만드냐는 질문에 정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자꾸 들여다 봐야 (공권력이)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지.” 1일 개봉.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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