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하루 전. 창밖으로 고등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이 보인다. 점심시간인 모양이다. 카메라가 창문 프레임 안으로 이동해서 교실을 비추면 또 하나의 프레임이 눈에 들어온다. 거울이다. 엎드린 채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세미(박혜수)의 뒷모습이 그 거울에 비친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이제 카메라는 세미의 얼굴과 마주한다. 세미는 조용히 볼 위의 눈물을 닦는다.
불길한 꿈을 꾼 세미는 수업을 땡땡이치고 친구 하은(김시은)에게로 향한다. 하은은 얼마 전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다. 유쾌한 성격 뒤로 무언가 비밀이 많은 하은. 세미는 그런 하은을 사랑한다. 오늘은 어떻게든 고백을 하고 싶지만 하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조바심이 난 세미는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수학여행에 같이 가자”고 무리하게 조른다.
하은은 또 하은대로 세미에게 맞춰주고 싶다.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다리에 깁스까지 한 채로 이제 와 수학여행에 갈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수학여행비를 구해보려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건, 그에게도 세미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는 이렇게 뚱땅거리는 두 사람의 어떤 하루를 따라간다.
우리는 마치 카메라의 초대를 받아 거울 속으로 빠져들어간 듯 세미와 하은의 세계를 만난다. 그곳은 빛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반짝거리는 세계이며, 끝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2014년 4월15일, 세월호가 가라앉기 바로 전날의 시간이 고여 있다.
‘너와 나’에선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들이 시간을 거슬러 다시 생기를 얻는다. 빛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몽롱하기까지 한 화면은 영화 속 시간이 꿈인지 환상인지 잘 구분되지 않도록 만들지만, 그 시간을 사는 존재들은 안산, 고등학교 건물, 단원고 앞 공원에서 가져온 거울, 물이 반쯤 담긴 물컵, 구멍 난 양말과 발꿈치 등 물질성을 띠는 장소와 사물, 신체를 통해 정직하게 구체화된다. ‘너와 나’는 시간을 다루는, 공간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가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공간은 어색할 정도로 인공적이다. 꿈에서 깨어나 하은에게 가는 길에 세미는 죽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던 세미는 새를 위해 특별한 무덤을 만들어준다. 그런 세미를 지켜보면서 한 친구가 말한다. 놀이터의 땅을 파니까 흙이 아니라 시멘트가 나왔다고. 그래서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을 묻어줄 수가 없었다고. 무심한 듯 흐르는 작은 목소리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었던 공간을 갑자기 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이미 세미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작은 새의 죽음과 함께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낯설어지는 순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세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 그러니까 “늙고 병들어서”가 아니라(“왜 다 죽는 거지?”라는 세미의 질문에 하은은 “정답, 늙고 병드니까”라고 답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로 생을 박탈당한 ‘사회적 죽음’은 이 사회를 받치고 있는 인공적인 구조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래서인지 ‘너와 나’는 세미와 하은이 함께 다니는 장소마다 푸르른 식물을 배치했다. 흙속에 파묻혀 있던 시멘트 바닥이 상징하는 비열하고 냉혹한 구조 안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생을 만들고 지키는 마음들이 있고, 우리가 그 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희망이 식물의 잎과 줄기, 그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 인식 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돌보는 반려에 대한 상상력 역시 인간들만의 배타적인 관계를 넘어 비인간 동물과의 관계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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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의 앵무새, 하은의 강아지, 그리고 세미와 하은이 길에서 만난 개 ‘진식이’. 이 고유한 존재들의 이야기는 다른 모든 이야기들과 씨줄 날줄을 이루면서 ‘2014년 4월15일의 안산’이라는 시리도록 아름답고 슬픈 태피스트리(색실을 짜넣어 그림을 표현하는 직물 공예)로 직조된다. 그 태피스트리는 영화 속 버림받은 개들의 모습처럼 현실의 고통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개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온기를 나누는 또 다른 시공간 역시 드러낸다.
조현철 감독은 2022년, 한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너와 나’에 대해 언급하면서 “죽음이란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배우이자 감독인 그에게 영화는 그런 ‘변화된 존재 양식’의 하나인 듯하다. 그는 세미와 하은의 어느 하루를 ‘영화’(cinema)라는 집단기억의 아카이브에 수록하기 위해 6년을 준비했다.
수상 소감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그날의 의상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모습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가 음성 언어로 “박길래, 김용균, 변희수, 이경택, 그리고 세월호 아이들”을 언급할 때, 그의 이미지 언어는 박남옥을 기억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쉽게 주류 서사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건 아티스트 조현철이 미디어 아카이브에 무엇을 되살려 기록하고자 하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적 퍼포먼스였다.
이런 맥락 때문에 나에게 ‘너와 나’는 메타 영화로도 다가왔다. 세미는 종종 프레임 속 프레임에 포착된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했던 교실 안 거울뿐만 아니라, 하은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있던 거울, 하은과 함께 간 공원 정자에 걸려 있던 거울 등에서 우리는 삶의 지속 속에서 포착되는 짧은 순간의 세미를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노래방 장면에선 아예 텔레비전 속 뮤직비디오에 행복하게 데이트를 하는 세미와 하은이, 농담처럼, 등장한다. 그건 세미의 환상이자 바람이지만, 사실 ‘너와 나’ 자체가 시간을 세월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기를 꿈꿨던 우리의 환상이자 바람이다.
이 작품에서 프레임 속 프레임은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이동한 세미를 꺼내어 우리가 그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스크린 위로 불러내는 마법의 창이다. 세미는 그 창을 통과하면서 신체와 목소리를 되찾는다. 영화야말로 그런 마법을 부리는 예술이고, 그렇게 매개(media)이자 영매(medium)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여전히 마법일 뿐이므로, ‘너와 나’의 화면은 그토록 산화된 채 이곳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