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티브이 붓다를 처음 제작할 당시 불상을 들고 웃고 있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티브이(TV)’에 나오는 장면들 중 일부다. 엣나인필름 제공
가슴이 먹먹하다.
화면 속에서 거장 백남준(1932~2006)은 전자음 파장과 춤추는 브라운관 속 여러 색깔의 실선이 되어 너울거리고 있었다.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의 테마 변주곡이 기묘하게 울려나오는 전자음, 디지털 비트 이미지의 효시가 된 영상 합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오색 실선 이미지의 춤들이 백남준의 넋을 일깨우며 마음을 울린다.
지난 6일 한국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달은 가장 오래된 티브이(TV)’는 미디어아트에서 느끼는 감동의 낯선 경지를 일러준다. 한국계 미국 영화감독 어맨다 김이 5년간 제작한 이 영화의 제목은 백남준이 1970년대에 만든 작품 제목과 같다. 인류가 옛적 처음 본 티브이 스크린이 세계 어디서든 빛나는 달이었다는 대가의 통찰처럼 백남준 74년 인생의 보석 같은 순간들이 그의 미디어아트 명작들과 함께 영화 속에서 빛난다.
“나비처럼 보이네요. 어 어어어 어허허헛 어커커커….” 백남준의 인상적인 흥얼거림과 거기에 맞춰 마구 흔들렸다가 정렬되는 브라운관 속 나비 모양의 브이(V)자 총천연색 이미지로 시작되는 영화는 한국인들이 생각해온 괴짜 미술가, 한국이 낳은 미술 거장 부류의 백남준 이미지를 비켜간다.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브 연이 고인의 생전 기록을 내레이션 하거나 고인의 생전 육성으로 이어지는 플롯은 고인의 삶을 따라 전개되는 순서를 취하지만 서사는 색다르다. ‘한국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고국에서 떠나 보낸’ 그가 “내겐 매일이 소통의 문제다. 어떡해야 소통을 더 잘할 수 있을까”라고 되뇌는 초반부 장면에서 화두가 시작되고 그의 주요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작품과 삶 구석구석을 찍은 여러 장면들이 풀려나간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의 영화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생상스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1960년대 샬럿 무어먼과의 나체 첼로 퍼포먼스 연주, 뉴욕 비 새는 아파트에서 영상기기들을 덮으면서 고난의 작업 시기를 보내는 모습, 록펠러재단 기금을 얻어 기술자 아베 슈야와 개발한 영상 합성기로 1973년 출세작 ‘글로벌 그루브’가 태어난 과정들, 1984년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지만 온갖 실수와 해프닝으로 점철된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뒷이야기, 금의환향 귀국 때 나온 기자들의 썰렁한 질문과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심오한 대답들, 1996년 중풍에 따른 투병과 불과 4년 뒤 이어진 구겐하임 특별전, 최후의 걸작 ‘야곱의 사다리’까지, 그는 위선자가 아닌 열정적인 현대미술의 사기꾼이었음을 이 영화는 찬찬히 보여준다.
관객들은 티브이를 갖고 노는 장난꾸러기이거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들머리에 놓인 최대 영상탑 ‘다다익선’의 위압적 이미지의 예술가로만 알려진 그가 기진맥진하게 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무조건 앞으로만 내달리면서 삶을 태운 고난의 개척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 현대미술사의 살아 있는 성녀로 불리는 위대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회상해 보면 (그의 삶과 일대기는) 모든 게 매우 논리적이었어요.”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