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 ‘공소시효 폐지’ ‘사형제 폐지’서명운동
“소재 풍부-사회적 관심 끌어 의제 설정 바람직”
“소재 풍부-사회적 관심 끌어 의제 설정 바람직”
한국 상업영화들이 논란 속에 있는 사회 문제를 과감하게 스크린 속에 끌어들이면서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가 특정 사안에 대한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과거 시민사회단체들의 몫을 자임하기도 한다.
2월1일 개봉을 앞둔 박진표 감독의 영화 <그놈 목소리>를 만든 영화사 ‘집’은 영화 홍보 단계에서부터 ‘전국 미아·실종가족 찾기 시민의 모임’ 등과 함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와 그 소급 적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1991년의 초등학생 이형호(당시 9살)군 납치·살인 사건의 공소시효(15년)가 지난해 1월 만료되면서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사는 시민단체와 함께 범인의 협박전화 음성과 필적, 몽타주 등을 담은 ‘온라인 국민수사본부’(www.wanted1991.org) 사이트를 만들었다. 지난달부터 벌어진 온라인 서명운동에는 지금까지 2만6천여명이 참여했다.
영화사 ‘집’의 허지희 마케팅팀장은 “영화 제작에 들어가면서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겠다고 형호 아버지와 약속했다”며 “영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15년째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벌여온 ‘전국 미아·실종가족 찾기 시민의 모임’ 나주봉 회장은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법 개정 운동이 결실을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설가 공지영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 감독·2006년)은 사형제 폐지에 부정적이던 여론을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개봉 한 달 뒤인 지난해 10월10일부터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벌여온 사형폐지 온라인 서명운동에 지금까지 2만여명이 참여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사형폐지운동 집중국’으로 정해 활동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김희진 사무국장은 “영화 상영 전엔 사형폐지에 대한 글을 쓰면 반박글만 올라왔지만 요즘엔 지지하는 반응이 많다”며 “흉악범이 잡힐 때마다 여론이 사형제 존치 쪽으로 확 쏠려 대중을 상대로 한 활동은 사실상 포기했는데, 우리가 실패한 일을 소설과 영화가 단번에 해냈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전남 여수에서 에이즈에 걸린 여성이 성매매를 하다 구속된 사건을 다룬 <너는 내 운명>(박진표 감독·2005년)도 많은 영화상을 휩쓸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에이즈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는 평가와, 여전히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에이즈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올린 건 분명하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우리나라에선 사건이 일어나면 한 차례 끓어올랐다가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가 지나간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 의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사형제나 에이즈, 장애인 등의 현실을 다루면서 한국 영화도 풍부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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