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번가의 기적’(감독 윤제균, 제작 두사부필름) 주연배우 하지원.(서울=연합뉴스)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여자 복서역
참 '징하게' 몸을 혹사하는 배우다. '색즉시공'에서는 에어로빅, '다모'와 '형사'에서는 뛰어난 검술, '황진이'에서는 춤과 거문고ㆍ가야금 솜씨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마치 프로처럼 선보였던 하지원.
영화 '1번가의 기적'(감독 윤제균, 제작 두사부필름)에서는 5전1무4패의 여자 복서 명란으로 등장한다. 하지원은 "감독님이 얼굴을 진짜 맞을 수 있는 여배우가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나 보다"고 말하며 웃는다.
'설마 자학증상이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에 깔깔 웃으며 "이상하게 몸을 혹사시켰던 작품이 반응이 좋았다"며 농반진반으로 답한다.
그러나 이내 진지한 속내로 이어진다.
"처음엔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습니다. 뭐든 배우는 게 좋았구요. 그런데 한 살 두 살 먹고, 한두 작품 해나가다 보니까 얼굴로만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말없이 몸으로만 표현해도 관객이 이해해줄 수 있을 정도까지 오르고 싶더군요. 지금은 그저 활동량이 많을 뿐입니다. 확실한 움직임이 있으니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죠."
'1번가의 기적'은 재개발로 없어지기 일보직전인 달동네 1번가를 무대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색즉시공'의 윤제균-임창정-하지원이 모였다는 이유로 보기 편한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다. 최근 상업영화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처럼 진지하면서도 보기 편하게 접근했던 작품은 보기 드물다.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시나리오에서. 지지리도 못사는 달동네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잖아요. 기적이라는 단어가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여기서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풀어가는 방식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자칫 무거운 주제일 수 있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펼쳐내는 따뜻한 웃음이 관객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기 때문.
"이런 점 때문에 윤 감독님을 믿어요. 슬프고 짠하지만 그들을 보면서 웃을 수 있도록 풀어간 점이. 진정성과 슬픔이 있는데 코미디를 잃지 않았죠.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신 분들이 '포스터를 봤을 때는 이렇게 센 영화일지 몰랐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동양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몸과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둔 가난한 여자 복서 명란. 명란은 전형적인 '내유외강'형이다.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으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코치로 등장하는) 주현 선생님께서 참 많은 말씀을 해주셔서 명란이 되기 쉬웠어요. 아버지로 등장하는 정두홍 감독님은 제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걱정했는데 조화가 잘 이뤄진 듯해 다행이에요."
그는 "이 영화에 자랑하고 싶은 장면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의 제작비로 최대의 정겨운 정취를 뽑아낸 물놀이 장면, 명란과 아버지가 교차돼 등장하는 링 위의 대결 등등.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등장인물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각자의 꿈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던 게 가장 좋다"고 말하며 "영화 완성본을 보고 감독님이 배역 하나하나를 모두 살려낸 게 너무 신기했다"고 덧붙였다.
'1번가의 기적'에 대해 말하며 하지원은 유난히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토마토(이는 영화의 중요한 오브제다) 하나를 갖는 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일이겠지만 암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일동ㆍ이순 남매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거죠. 작든 크든 가슴 속에 바람, 더 크다면 기적이 일어나길 품고 있는데 그 바람이나 희망을 끝까지 갖고 있는 게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드라마 '황진이'의 여운을 물었다. '황진이'를 통해 연기자로서는 최대 영광인 연기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정작 그는 화려한 영광보다는 배우로서 내면의 성장을 이루게 한 작품으로 뿌듯해했다.
"제가 참 많이 배운 작품이에요. 황진이는 요즘 세상에서는 탁월한 연예인이었을 겁니다. 그 분을 통해 제가 가진 재주를 사람들에게 보여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서 제가 가진 재주를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인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배우도 마찬가지죠. 저 혼자 도취돼 연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요. 관객과 교감이 될 때 진정성이 생겨나죠."
'황진이'에서 배우로서 지향점을 찾은 듯한 하지원은 '1번가의 기적'에서 희망을 말한다.
"정말 죽을 것처럼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넋 놓고 체념한 채 살아가기보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희망을 품는 게 더 낫잖아요. 진짜 절실히 노력하면 뭔가 이뤄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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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희 기자 kah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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