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 올림픽’
한국예종 교수 된 ‘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
1988년 2월, 김동원 감독은 27분짜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완성했다. 올림픽 준비로 온나라가 들떴을 때 서울 상계동 달동네 주민들은 집을 빼앗겼다. 2년6개월 동안 상계동에서 명동 성당으로 다시 부천시 자투리 땅까지 철거민들이 내몰리는 과정을 좇으면서 다큐멘터리 속 나레이션의 주어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됐다. <상계동 올림픽>은 우리 영화계에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기념비가 됐다. 마지막 장면, 성화봉송 때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가건물을 세우는 것도 허가받지 못한 주민들은 허허벌판에서 <출전가>를 불렀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김동원(52) 감독은 최근 <상계동 올림픽 20년 후>를 찍기 시작했다.
철거민·자신의 변화 담은 속편 착수
강단서 첫 다큐전문사 과정 맡아
“옆길로 샌듯하지만 제자리 돌아올것”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목적도 없이 철거 현장에 넋이 나가 카메라를 돌리던 31살 초짜 감독 김동원은 그 뒤 20년 동안 독립다큐멘터리를 떠나지 않았다. 1991년 그가 변영주, 오기민 등과 만든 제작집단 ‘푸른영상’을 지키며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명성, 6일간의 기록> <송환> 등을 내놓았다. 그렇게 극영화를 비롯해 ‘제도권’과 거리를 뒀던 그가 올해 한국예술종합대학 방송영상학과 교수가 되어 국내에 처음 생기는 다큐멘터리 전문사 과정을 맡게 됐다. 그는 작품 제작보다 교육 쪽에 무게중심을 두게 되는 걸까? 제도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18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 감독을 만나 그의 새 작품 이야기, 그리고 교수가 된 사연과 심경을 들어봤다.
<상계동 올림픽> 그후
다큐멘터리가 나간 뒤 상계동 철거민에겐 공동체를 꾸릴 터전이 생긴 듯했다. 재개발 건축업체, 천주교, 서울시가 기금을 모아 부천에 땅을 사고 아파트를 올려 철거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줄 계획이었다. 관리가 복잡해지자 일단 8평 남짓씩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땅값이 1년새 8배가 뛰면서 되레 액운이 몰려왔다. 주민들 사이, 대표자들 사이 신뢰가 틀어져버린 것이다. 3년 동안 가족처럼 연대했던 사람들이 서로 꼴보기 싫어하는 사이가 되어갔고, 결국 40가구 가운데 3가구만 남고 모두 땅을 팔아 흩어졌다. 절반은 억척스럽게 일해 살림이 나아졌다. 애초에 노동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추락해 노숙자가 됐다. 몇몇은 투쟁의 기억을 긍지로 가지고 있고 몇몇은 철거민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긴다.
그는 다큐멘터리들에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담뿍 담아왔다. 아직도 믿고 있을까? “예전처럼 낙관하지 않는다. 저마다 욕망과 본성이 달라 공동체는 실패하기 쉽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는 세상의 빛이 된다. 나나 상계동 주민이나 꿈꾸는 공동체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다. 그건 어떤 모습이며 우리에게 남은 최선은 뭘까?”
주민들은 여전히 송년회를 연다. 2세들 가운데 3분의 1은 매년 2~3차례 모인다. 그는 그 불씨의 구심력인 “긍지의 기억”을 조명하려 한다.
상계동의 기억 그는 <상계동 올림픽 20년후>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을 예정이다. 상계동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중산층 출신으로 한량처럼 지내다가 군 제대 뒤 영화 연출부로 일했고,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촬영을 해주며 용돈을 벌었다. 1985년 그는 상계동에서 계고장도 없이 집을 부수는데 증거자료를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단한 일인 줄 알고 하루 촬영하러 갔는데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철거민들은 사지를 들려 닭장차에 실려갔다. 그는 정신없이 찍었다. 어둠이 내린 뒤 주민들은 폐허 위에 큰 천막을 쳤다. 라면을 끓여먹고 술판을 벌였다. “내가 반쪽짜리 위선적인 세상에서 살았구나….” 도저히 천막을 들추고 혼자만 나갈 수 없었다. 하루를 보내기로 했고 다음날도 비슷했다. 그는 그때부터 1990년 1월까지 상계동 철거민들과 살았다. 그래서 상계동 철거민들은 그를 아직도 “김 감독님”이 아니라 “민기 아버지”라고 부른다. 가난의 힘 “어떤 주장을 하는데 힘을 실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난해야 떳떳하다. 세상을 낮은 데서 봐야 정확하다.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주류 삶의 방식과 기치관에 딴죽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필요한 것만 지니려 애쓰지만 그는 “악착같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고백한다. 생활 자체가 협박이다. 늘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세 아이들 앞에선 조금씩 점점 양보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떠맡아야 할 생활의 짐이 있고 교수직을 맡아 좀더 안정될지 모르지만, 마음은 복잡해졌다. 다큐멘터리가 영화와 저널리즘과 사이에서 제 영역을 굳건히 하려면 교육방법도 개발해야 하고 다큐멘터리를 모아 아카이브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주먹구구로 공부해서 더 필요를 느낀다.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벗어나는 건 아닌지 회의한다. 긍정을 위한 질문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교수가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옆길로 샌 듯한….”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때문이다. 천도교빈민회 회원들 가운데 힘들지만 의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힘이 나고 날 보면 맥이 빠진다. 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이다.” 생활공동체에선 쓴맛을 봤지만 그의 곁엔 제작공동체인 푸른영상이 남아 있다. 감독 7명은 한달 활동비 50만원으로 버티며 미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는 대추리로 가고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을 만난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푸른영상(02-823-9124)의 회원이 되면 된다. 3월30일부터 4월3일까지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벌(sidof.org)에서 <명성, 6일간의 기록>과 <송환>을 볼 수 있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강단서 첫 다큐전문사 과정 맡아
“옆길로 샌듯하지만 제자리 돌아올것”
김동원 감독
김동원 감독
상계동의 기억 그는 <상계동 올림픽 20년후>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을 예정이다. 상계동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중산층 출신으로 한량처럼 지내다가 군 제대 뒤 영화 연출부로 일했고,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촬영을 해주며 용돈을 벌었다. 1985년 그는 상계동에서 계고장도 없이 집을 부수는데 증거자료를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단한 일인 줄 알고 하루 촬영하러 갔는데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철거민들은 사지를 들려 닭장차에 실려갔다. 그는 정신없이 찍었다. 어둠이 내린 뒤 주민들은 폐허 위에 큰 천막을 쳤다. 라면을 끓여먹고 술판을 벌였다. “내가 반쪽짜리 위선적인 세상에서 살았구나….” 도저히 천막을 들추고 혼자만 나갈 수 없었다. 하루를 보내기로 했고 다음날도 비슷했다. 그는 그때부터 1990년 1월까지 상계동 철거민들과 살았다. 그래서 상계동 철거민들은 그를 아직도 “김 감독님”이 아니라 “민기 아버지”라고 부른다. 가난의 힘 “어떤 주장을 하는데 힘을 실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난해야 떳떳하다. 세상을 낮은 데서 봐야 정확하다.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주류 삶의 방식과 기치관에 딴죽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필요한 것만 지니려 애쓰지만 그는 “악착같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고백한다. 생활 자체가 협박이다. 늘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세 아이들 앞에선 조금씩 점점 양보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떠맡아야 할 생활의 짐이 있고 교수직을 맡아 좀더 안정될지 모르지만, 마음은 복잡해졌다. 다큐멘터리가 영화와 저널리즘과 사이에서 제 영역을 굳건히 하려면 교육방법도 개발해야 하고 다큐멘터리를 모아 아카이브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주먹구구로 공부해서 더 필요를 느낀다.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벗어나는 건 아닌지 회의한다. 긍정을 위한 질문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교수가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옆길로 샌 듯한….”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때문이다. 천도교빈민회 회원들 가운데 힘들지만 의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힘이 나고 날 보면 맥이 빠진다. 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이다.” 생활공동체에선 쓴맛을 봤지만 그의 곁엔 제작공동체인 푸른영상이 남아 있다. 감독 7명은 한달 활동비 50만원으로 버티며 미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는 대추리로 가고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을 만난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푸른영상(02-823-9124)의 회원이 되면 된다. 3월30일부터 4월3일까지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벌(sidof.org)에서 <명성, 6일간의 기록>과 <송환>을 볼 수 있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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