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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따스한 그녀, 사장이 되었다…그리고?

등록 2008-09-21 18:17수정 2008-09-21 19:29

켄 로치 감독 ‘자유로운 세계’
세련된 솜씨로 ‘이주 노동자’ 다뤄
‘착취의 먹이사슬’ 시작점 되물어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세계화의 그늘을 고발한 켄 로치 감독의 신작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나서 좀체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영화가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한 영국보다도 훨씬 더 악랄하고 잔인했던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에게는 왜 그런 역사를 시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없을까? 쉽게 해답이 구해질 문제는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켄 로치가 역사와 현실에 정면으로 마주서서 그 본질을 파고들어가는 감독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세계>는 현실의 모순을 날것으로 드러내면서도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사회파’ 감독의 영화는 지루하고 따분할 것이라는 편견은 버리는 게 좋다.

켄 로치는 예상을 깨고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까지는 노동자였다가 사용자로 변신한 여자가 주인공이다. 직업소개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싱글맘 앤지(키어스턴 웨어링)는 엉덩이를 만지는 상사에게 대들었다가 부당한 인사 조처를 당한다. 화가 난 앤지는 사표를 던지고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회사를 직접 차린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열심히 영업한 덕에 사세는 빠르게 커진다. 그런데 월급을 줘야 할 원청회사가 부도를 내고, 노동자들이 앤지를 상대로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불법체류자인 이란 노동자 가족을 집으로 불러 따뜻한 음식을 먹여주는 착한 사람이었던 앤지는 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으로 변한다. 불법체류자들을 상대로 인력알선을 해주는 행위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앤지는 스스로 위안하지만, 실은 착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게 켄 로치의 생각이다.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앤지는 사용자이자 노동자이며,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한몸에 안은 앤지를 통해 켄 로치는 묻는다. 이 모든 문제가 어디서 비롯하는가를.

켄 로치는 호불호가 가장 명확히 갈리는 감독 중 하나다. 칠순을 훌쩍 넘긴 노감독의 열정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다. 그의 좌파적 세계관에 동의하는 이들은 노동자들의 문제를 유장하게 풀어내는 솜씨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 반대하는 이들은 영화를 정치의 도구로 이용한다며 깎아내린다. 마지막은 세계관보다는 취향의 문제인데, 그의 문제제기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사회 문제를 대놓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가 사물의 움직임을 다루는 예술이 아니라, 움직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여부를 다루는 예술”이라는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한다면, 켄 로치의 영화를 놓치지 말 일이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른 지금, 유럽의 감독들은 이주노동자를 직·간접으로 다룬 영화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8월 국내 개봉해 인기리에 장기상영 중인 이스라엘 영화 <누들>이나, 아직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올해 칸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던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좋은 예다. 이주노동자 100만 시대를 맞은,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우리나라에서도 시대에 공명하는 감독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까? 25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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