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 주연의 영화 <사과>는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평범하지 않게 다룬다. 극적인 기복 없이, 잔주름 같은 삶의 편린들을 유머러스하게 펼치는 방식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느낌을 준다. 다만, 홍상수가 본능에 이끌리는 남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데 반해, <사과>는 여자가 주체가 되어, 여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그렇다면 강이관 감독은 여자 홍상수?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밝히면, 강이관은 1971년생 남자 감독이다. 대신 50쌍의 남녀를 심층 면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 <사과>는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남녀의 차이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인 셈이다.
영화는 20대 후반의 직장여성 현정(문소리)이 겪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된 사랑이 가고 새로운 사랑이 오는데, 영화는 풍부한 세부 묘사로 그 설레는 순간과 참담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한다. 설레는 시작이란 이런 것이다.
“저 이런 거 처음 해보는데요, 혹시 저랑 사귀어보지 않으실래요?”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상훈(김태우)은 현정을 쫓아와 이렇게 말을 건다. 현정은 “저 남자 친구 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피식피식 웃고 있다.
그런데 7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 민석(이선균)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잠자리에서든 함께 놀러 간 제주도(우도) 산책길에서든 그의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랑을 확신하는 현정은 전혀 눈치를 못 챈다. 민석은 결국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야멸치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 뒤로도 상훈은 계속 현정을 쫓아다닌다. 말없이 명함을 놓고 가거나, 꽃다발을 주고 가버리는 식이다. 이것이 호기심을 일으키려는 전략(그것도 남의 아이디어)이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사귀고 난 뒤에나 드러난다. 현정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상훈과 사귀기 시작한다. 재미는 없지만 착하고 순수한 느낌이 싫지는 않다. 숲속에서의 ‘반말하기 놀이’며, 술에 취한 상훈이 한밤중에 현정의 집 앞으로 찾아오는 에피소드들은 구체적이고 살갑다.
영화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내놓기보다 통념의 속살을 헤집는 방식을 택한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현정은 상훈을 껴안으며 “결혼 전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됐어. 당신은 어때?”라고 묻는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아는 두 가지 속설을 재연하는 것이다. 여자에겐 지나간 사랑보다 현재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여자는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속설 말이다.
이에 대한 상훈의 대답.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역시 남자는 애정 표현에 인색하다는 통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상훈은 점점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답답한 남편이 되어 가고, 연애할 때는 몰랐던 상훈의 폭력성에 현정이 깜짝 놀라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다시 찾아온 민석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하다.
강이관 감독의 데뷔작인 <사과>는 2005년 개봉하려고 했던 작품이다. 개봉이 3년이나 늦어진 것은 제작사(청어람)와 배급사(쇼박스) 사이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틀어야 하는 전형적인 가을 영화라서, 한번 시기를 놓치면 1년을 허송해야 하는 탓도 있었다. 그러나 <사과>는 유행을 타는 영화가 아니다. 환상이나 과장을 걷어낸 맨얼굴의 연애는 시대를 초월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16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청어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