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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떠도는 경계인이 피워낸 통렬한 꽃 한송이

등록 2008-11-02 19:31수정 2008-11-02 21:35

재중동포 장률 감독 ‘중경’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시인)고 했던가. 그 시적 표현을 빌리면, 재중동포 영화감독 장률(46)은 이 시대 ‘가장 통렬한 꽃을 피워내는 가장 뾰족한 경계’라 할 만하다. 남한과 북한, 중국, 어딜 가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는 영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어떤 원초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중국말과 한국말, 연변말과 북한말을 마구 충돌시키며, 우리가 애써 잊고 지내던 과거와 현재를 우리 앞에 불러 세운다. 그것은 삭막하고 황량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의 신세계다.

한국 이리역 폭발사고 모티브
중경 여성 ‘쑤이’의 일상 담아
‘소통 실패’ 속 삶의 깊은 성찰

■ 언어 장률 감독의 신작 <중경>에서는 베이징말과 쓰촨말, 그리고 한국말이 서로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소통은 실패한다. 조선족 여인이 주인공이었던 <망종>, 탈북 여성을 몽골의 초원에 부려놓았던 <경계>를 지나, <중경>은 쓰촨성의 성도 충칭(중경)에 사는 여성 쑤이(궈커위)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인구 3천만의 거대 도시 충칭에서 외국인들에게 베이징말을 가르치는 쑤이는 쓰촨말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끝내 불화한다. 쑤이는 한국에서 온 김씨(주광쉬안)를 좋아하지만, 김씨는 “한국도 재미없지만 여기도 재미없다”며 몽골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이리역 화약 폭발 사고 때 가수 하춘화의 공연을 보려고 극장 화장실 창문을 넘다”가 성불구가 됐다는 김씨는 쑤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 성(性) 소통의 실패는 언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장률이 주로 탐구하는 주제인 ‘성’도 마찬가지다. 쓰레기를 주운 돈으로 여자를 사던 쑤이의 아버지는 결국 경찰에 적발된다. 쑤이는 아버지를 풀어준 경찰 왕위(허궈펑)와 관계를 맺지만, 쑤이는 유부남인 왕위의 여러 애인 중 하나일 뿐이다.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받고 있는 이 영화에서 장률 감독은 “한 사회가 타락할 때 가장 먼저 문란해지는 성”을 통해 대도시 충칭을 해부한다. 가장 내밀한 소통의 표현인 성조차 물물거래의 대상이자, 권력관계 말단의 노리개로 전락한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기란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다.

■ 물신 영화에서 충칭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극한에 이른, 물신주의에 중독된 도시로 묘사된다. 폭력배들이 대낮에 총으로 사람을 쏴죽여도, 식당에서 끓는 기름에 강제로 손을 집어넣게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내 땅을 돌려달라”며 1인 시위를 벌이는 사람의 펼침막은 외롭게 바람에 펄럭인다. 쑤이가 사는 건물이 철거 위기에 몰리자 주민들은 저항을 다짐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인터내셔널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파묻힌다.

■ 소리 영화감독인 친구와 말다툼 끝에 “영화는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며 서른아홉 나이에 뒤늦게 영화에 뛰어들기 전까지, 장률은 영화에 대해 아무 교육도 받지 않은 소설가 겸 중문과 교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카메라 시점과 움직임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소리나 표정만으로 끔찍한 일을 묘사하는 방식도 새롭다. 인물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을 때만 드물게 말하고, 바람소리, 발소리는 더욱 크게 들린다.

■ 이리 <중경>은 원래 장률 감독이 영화 <이리>의 전반부로 촬영한 것을 하나의 독립된 장편 영화로 발표한 것이다. 폭발 이후의 도시 이리(익산)로 가기 전에, 폭발 직전의 도시 충칭을 들여다본다는 의도였는데, 9일 만에 촬영된 분량이 한 편의 영화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중경>은 6일 개봉하며, 윤진서·엄태웅 주연의 <이리>는 13일 개봉한다. 타고난 소수자 감성으로 위선과 가식을 꿰뚫는 장률의 시선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흔들어 놓을지 기대된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스폰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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