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그랜 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께
안녕하세요, 감독님. 건강은 어떠신가요? 오는 19일 한국에서 개봉하는 <그랜 토리노>를 미리 봤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더군요. 일흔아홉의 나이에 연출만 하는 것도 쉽지 않으실 텐데, 주연으로 출연해서 (좀 느리긴 하지만) 액션까지 보여주셨잖아요. 지난해 5월 칸 영화제에서 만삭의 앤절리나 졸리와 함께 있는 감독님을 먼발치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기력이 없어 보이셨거든요. 지금 미국에선 <그랜 토리노>가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죠? 제작비 3300만달러(현재 환율로 500억원)짜리 영화가 지난 주말(3월1일)까지 12주 만에 1억3850만달러를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미국 사람들이 왜 <그랜 토리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세요?
무엇보다 감독님이 직접 출연했기 때문 아닐까요? 이전에 나온 감독님 작품 중 최고 흥행작 역시 감독님이 출연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1억49만달러)였잖아요. 미국인들은 감독님을 자연인이 아닌 ‘미국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서부 개척시대(<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등)부터 도시화 이후(<더티 해리> <블러드 워크> 등)까지 총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감독님의 모습 속에 미국의 얼굴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이 돈 시겔 (1991년 사망) 감독이 연출한 <더티 해리>일 것 같습니다. 감독님이 엠1 소총을 손에 쥐고 카메라를 노려보는 <그랜 토리노>의 포스터를 보고, 미국인들은 ‘해리’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흉악한 범인을 처단하고야 말던 그 강직한 형사 말이죠.
세월이 흘러 ‘해리’도 늙었습니다. 전형적인 ‘꼰대’가 됐지요. <그랜 토리노>에서 감독님이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으로 유색 인종을 혐오하는 완고하고 신경질적인 할아버지죠. 코왈스키가 배꼽티를 입고 장례식장에 나타난 손녀를 보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르렁거리는 장면 있잖아요. 저한테는 그 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리더라고요. 호랑이가 목소리를 더빙한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아들이라는 녀석들은 뒷자리에 앉아 ‘저 노인네 또 성질 부리고 있다’고 호박씨나 까고 있고…. 어쩌겠습니까? 그게 코왈스키가 살아온 인생인걸요.
79살에 연출, 주연까지 하셨군요
인종차별 참전용사 연기 최고네요
이번 작품에서는 시나리오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왠지 이 영화가 감독님의 자기 고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도 그중 하나지요. 코왈스키의 아내는 성당의 신부(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코왈스키는 신부를 ‘가방끈 긴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무시하죠. 깡패들이 난동 부릴 때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신부가 묻자 “경찰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오지 않았다”고 답하는 장면은 신성모독의 결정판이에요. <밀리언 달러…>에서 프랭키가 신부에게 “하느님은 과연 존재하는지”를 집요하게 묻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에요. 결국 프랭키가 그랬던 것처럼 코왈스키 역시 종교나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끝내고 말죠.
코왈스키가 뉘우치게 되는 계기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이웃 몽족 주민들(라오스, 베트남, 타이 등에 흩어져 살던 소수 민족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편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뒤 미국으로 쫓겨 온)로부터 옵니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포드 자동차 1972년형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던 몽족 소년 타오(비 뱅)를 용서하고, 그의 수호천사가 된다는 설정은 자못 상징적이에요. 인종 편견과 차별을 반성한다는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극우주의자들의 허물까지 몽땅 안고 가겠다는 선언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화가 감독님의 유언장 같다고 얘기합니다. 시사회에 참석했던 한국의 한 영화 제작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할아버지 정말 죽으려고 그러시나. 영화가 마치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 있는 듯해요.”
유언장을 미리 써놓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만큼 남은 생을 더 경건하게 살 수 있게 되죠. 그래도 감독님은 더 오래 사셔야 해요. 세계인들은 감독님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어 한답니다. ‘넬슨 만델라’ 의 전기 영화 촬영을 곧 시작하신다고요? 주연을 맡은 모건 프리먼 할아버지께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인종차별 참전용사 연기 최고네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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