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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아버지 박정희’를 ‘욕’보이려고?

등록 2005-01-15 11:57수정 2005-01-15 11:57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홍보 포스터. 제공 \'그때 그사람들\' 홈페이지(www.people2005.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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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홍보 포스터. 제공 \'그때 그사람들\' 홈페이지(www.people2005.co.kr) \\
[이슈] 박지만 ‘그때 그사람(들)’가처분 신청은 정당한가?

보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 하는가? 아니면 영화의 흥행을 위해 죽은 자의 사생활을 왜곡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망자의 명예를 훼손한 것인가? 개봉도 되지 않은 한 편의 영화가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에 휘말렸다.

박지만씨가 10·26을 소재로 한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이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법에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박씨는 신청서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일본가요를 즐겨 들었다거나 시해 장면에서 김재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 등은 개인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박 전 대통령이 사생활이 문란하고 일본을 동경하는 매국적 인물이나 조직폭력배처럼 보이는 영화 장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영화사 쪽은 물론 시민단체들도 “상영하지도 않은 영화를 놓고 명예훼손을 이유로 가처분신청을 낸 것은 영화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과연 박지만씨의 가처분 신청은 정당한 것인가? 또 <그 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더럽힐 의도가 분명한가?


# ‘다큐멘타리’인가? ‘블랙코미디’인가?

“영화의 주인공은 박정희 아닌 역사적 사건에 멋 모르고 죽은 사람들 이야기”

<그 때 그 사람(들)>은 강제규&명필름이 한국 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하루인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당한 날의 아비규환을 스크린 위에서 재조명했다. 소재 자체의 민감성 때문에 이 영화는 기획과 촬영 과정은 물론 출연 배우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장르로 보면 이 영화는 역사물을 다루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방식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몸소 겪어온 우리시대 모두가 공감하면서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블랙코미디’를 택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현장을 소재로 흥행에 성공한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재현한 사실적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이 제작사인 강제규&명필름의 설명이다.

제작사는 이 영화가 박정희 살해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주인공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대통령 살해 사건에 가담하거나 그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한다.

임상수 감독은 최근 영화잡지 <필름 2.0>(www.film2.co.kr)과의 인터뷰에서 “10·26처럼 중요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없는 게 한국의 현대사”라며 “이 영화는 권력의 중심에 선 사람들에 의해 황급히 마무리된 사건에서 멋 모르고 죽어간 인물들에 대한 작가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제작사가 홈페이지(www.people2005.co.kr)를 통해 공개한 대략의 줄거리에서도 박정희를 직접 암시하는 등장인물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헬기에 자리가 없다고 대통령과의 행사에 함께 가지 못하고 병원을 찾은 중앙정보부 김 부장’, ‘김 부장의 오른팔 주 과장’,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부하 영조와 순박한 준형’ ,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온 경비원 원태’, ‘해병대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지목된 운전수 상욱’….

그러나 박지만씨는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가 아니라 실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한다.

박씨는 가처분 신청서에서 “(이 영화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일대 비극이었던 10·26사건을 소재로 한 것으로 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시해한 당일·다음날 실존인물들의 행적을 극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제작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건을 소재로 픽션을 가미해 영상미학적으로 재구성한 표현물이 아니라 실재 사건을 사실 그대로 다큐멘터리화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양 쪽은 영화의 장르는 물론 누구를 주인공으로, 무엇을 재구성했느냐를 놓고 근본적으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 이 영화는 박정희의 사생활을 왜곡했는가?

“일본을 동경하는 매국적 인물이나 조직폭력배처럼…”
“박정희는 영화의 갈등구조와 장치 중 하나의 소재”

박지만씨는 가처분 신청서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부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중년 부인의 대사부터 박정희의 사생활을 허위왜곡하는 내용으로 시작(#2)”

“업무집행하면서 측근들에게 사용하는 언어의 상당 부분을 일본어로 표현(#5, 9, 23)”

“연회석에서는 일본가요를 즐겨 듣는 캐릭터로 설정(#9)”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고인이 사생활이 문란하고 일본을 동경하는 매국적 인물로 오인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56)”

“시해 현장 장면에서 총격받은 고인의 대사를 마치 김재규에게 목숨 구걸하는 양 묘사(어…박 부장씨…박 장군, 왜 그래…또 쏠려구?) 영화 <친구>의 ‘많이 묵었다 아이가’를 연상시키는 대사(나 벌써 한방 먹었다 아이가, 박 장군)로 고인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조직폭력배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로 연상됨”

“10·26 관계자 행적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통해 명백히 역사에 기록된 것”

박씨는 가처분 신청서에서 “실존 인물을 영상 표현물로 재구성할 때 인격권 침해나 명예를 훼손한 허위 사실을 적시하면 안 된다”며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을 극장에 상영하거나 비디오테이프, DVD,CD로 판매·배포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흥행에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제규&명필름의 이동직 변호사는 이같은 명예훼손 주장에 대해 “박정희는 이 영화의 수많은 영화의 갈등구조와 장치 가운데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이 변호사는 “이순신이라는 대하드라마 속에서 이순신이 당시에 마차를 탔는지, 말을 탔는지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며 “마찬가지로 당시 박정희가 죽으면서 ‘억’하고 죽었는지, ‘악’하고 죽었는지를 어떻게 완벽하게 밝히고 복원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또 그는 “영화에서 그 것을 밝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 이 영화에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박 대표 흠집내기” VS “정치엔 관심도 없다”

이 영화와 관련한 또 한 가지 논쟁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가족사를 끄집어내 정치적으로 흠집내기를 하려는 것이라는 의혹 제기다.

실제 지난 12월 말 이 영화의 촬영작업이 마무리된 시점에 이런 문제 제기가 터져나왔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당시 여야가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시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가 제작돼 박 대표를 흠집내려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영 당시 대표 비서실장은 “문화·예술이 과거사를 소재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하지만 사실에 입각하기를 기대한다”고 <그 때 그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이재오 의원도 “지나간 시대를 영화에서 조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자칫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영화를 만들어선 안될 것”이라며 “이같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영화는 하나의 선전물이 될 수밖에 없고 예술적 가치가 없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런 정치적 해석은 박씨가 11일 가처분 신청을 낸 뒤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기획한 영화사나 시나리오 작가 등이 주사파나 현 정권의 주구들은 아닌지 의심된다. 이 영화는 예술을 빙자한 정략의 산물”(한토마 ‘매야’), “박근혜 대표를 죽이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을 비하한 열우당의 비굴한 정치적 영화”(네이버 ‘imbmwgo’) 등이 그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 쪽은 이런 주장이 “영화를 전혀 모르는 정치적 해석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임상수 감독은 <필름 2.0>과 인터뷰에서 “현실정치에 관심이 있지도 않고,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며 “영화감독으로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0·26의 진실을 작품으로 말하고 싶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 변호사도 “보통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획, 촬영, 편집 등에 3∼4년은 걸린다”며 “이 영화가 기획된 시점은 지난 2003년 초로 박근혜 대표가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기 전이라서 정치적 음모론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면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다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전 대통령을 소재로 과거 역사를 다룬 영화에 대한 보수 쪽의 알레르기적 반응은 이번만이 아니다. 청와대 이발사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다룬 영화 <효자동 이발사>도 박 전 대통령을 왜곡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효자동 이발사>가 한창 상영중이었던 지난해 5월5일 박근혜 대표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 앞에서 “효자동 이발사가 박 전 대통령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유인물을 돌렸다.

이들은 유인물에서 “효자동 이발사가 실제 모델을 모티브로 했지만 엄연히 픽션인데도 박 전 대통령을 잘 모르는 10∼20대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고 역사와 풍자를 헛갈릴 우려가 있어 유인물을 나눠줬다”며 “박 대표를 보호하려는 취지는 아니다”고 말했다.



# ‘아버지 박정희’와 표현의 자유

“개인의 가족사와 공인의 역사도 구분 못하나”

제작사인 강제규&명필름은 박씨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항의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들의 모습을, 사실적 자료에 근거해 영화적으로 가공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예술·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현직 대통령을 비꼬고 패러디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건강한 사회”라며 “국가기관도 아니고 아직 개봉되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이 것은 빼라, 저 것은 넣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꼬집었다.

이 변호사는 “박정희는 개인이 아니라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의 공인”이라며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예술작품을 상영하지 못하게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은 자신의 가족사와 공인의 역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박씨를 비난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도 “보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 하는가”라며 박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민언련 영화모니터분과는 12일 성명을 내어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해 내는 예술의 한 양식”이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한 사건이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틀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작자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민언련은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영화의 시나리오만을 보고 장면의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하겠다는 발상은 작가의 창작 영역을 정치적인 잣대로 사전 검열하고 제한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라며 “대한민국 관객의 수준을 뉴스와 극영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별력 없는 이들로 낮추어 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명예훼손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도 제작사는 2월3일 개봉을 목표로 현재 편집과 녹음, 음향 등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제작사 쪽은 “처음부터 명예훼손 논란을 우려해 실존인물들의 실명은 사용하지 않고 영화제작 과정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등 법률적인 검토를 마친 상태라 개봉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공방은 어느 쪽에 유리할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논란으로 인해 관련 기사와 영화 포스터, 줄거리, 예고편 동영상이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지면서 영화가 엄청난 홍보 효과를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박지만씨가 영화 홍보를 너무 잘해줘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네이버 ‘moowora’)

2월3일,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하루였던 10·26을 다룬 <그 때 그 사람(들)>을 개봉관에서 볼 수 있을까? 영화팬들은 물론 유신독재의 암울한 한 시대를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도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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