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놀라운 습작’ 쏟아내는 한국영화아카데미

등록 2009-11-29 19:16

<나는 곤경에 처했다>
<나는 곤경에 처했다>
올해 선보인 장편영화 4편…저예산으로도 “손색없는 작품성”
소상민 감독 ‘나는 곤경에 처했다’ 부산영화제 뉴커런츠상까지
퀴즈 하나. 봉준호, 최동훈, 김태용 감독의 공통점은? 답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생들이라는 것이다. 국내 유일의 국립영화학교로서 숱한 감독과 프로듀서, 촬영감독, 영화과 교수를 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명실상부한 한국영화 사관학교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자신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 ‘카파(KAFA) 필름’(장편제작연구과정)이란 이름으로 장편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2008년 장편영화 4편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도 장편영화 4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주류 제작사들이 1년에 한두편 만들기도 어려운 요즘 상황에서, 제작사도 아닌 교육기관이 매년 장편 4편을 만들어 내는 건 놀라운 생산성이다. 편당 1억원 미만의 저예산으로 국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2008년 작품 중 <어떤 개인 날>(감독 이숙경)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넷팩)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도 <나는 곤경에 처했다>(감독 소상민)가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경쟁부문 대상)을 받는 등 성가를 높이고 있다.

장편제작연구과정 2기 작품들을 관통하는 거대담론이 하나 있다면 바로 ‘먹고사니즘’이다. 책으로 펴낸 이들의 제작노트 제목이 <카메라, 88만원 세대의 심장을 쏘다>인 것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아냥을 넘어 20~30대 산업예비군의 삶의 조건으로서 취업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들이 무슨 대단한 통찰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 장르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나 ‘여기, 오늘’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젊은 노력조차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개성 뚜렷한 4인 4색 작가들의 등장으로 한국 영화가 한층 풍성해졌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왼쪽부터 <너와 나의 21세기>, <여자 없는 세상>
왼쪽부터 <너와 나의 21세기>, <여자 없는 세상>
<나는 곤경에 처했다>의 소상민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입학 때부터 ‘제2의 홍상수’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스스로도 그런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탓인지 홍상수 감독과 다른 영화를 만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홍 감독의 영화처럼 남녀의 연애담과 뒤얽힌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시인과 백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선우(민성욱)의 자아 찾기에 골몰한다. 선우는 술에 취해 애인 유나(정지연)에게 “지구는 너희 같은 직장인들만 지키는 게 아니”라며 주정을 부리고, 백수라며 자신을 깔보는 변호사 동창생에게 시비를 건다. 그러나 비교적 엉뚱하고 깜찍한 결말로 긍정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자학이나 위악도 홍상수 감독보다는 훨씬 덜한 편이다.

류형기 감독의 <너와 나의 21세기>는 비정규직 인생을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의 고단한 일상을 다룬 누아르 같은 영화다. 화면은 시종 어둡고 희망이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패션회사 취직을 준비하는 수영(한수연)은 면접에 필요한 ‘44 사이즈’ 몸매를 만들기 위한 수술 비용을 마련하려고 마트에서 물건을 훔친다. 그러다 사채회사에서 일하는 재범(이환)을 만나는데, 재범은 일찍이 인생을 포기한 듯 보이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다. 결말이 보여주는 수영의 비정한 선택은 꿈을 꿀 권리조차 박탈당한 세대의 슬픈 자화상처럼 보인다.


<로망은 없다>
<로망은 없다>
<여자 없는 세상>은 일찍부터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든 주인공 창현(강원재)을 중심으로 친구 4명이 돈과 여자를 얻기 위해 벌이는 생존투쟁을 그린 영화다. “6년 안에 50억원을 벌어 미스코리아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인 창현은 서울 목동에 퓨전선술집을 차린다. 송재윤 감독은 동시대의 욕망에 거울을 비춤으로써 우리의 맨얼굴을 날것 그대로 들여다보게 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도 놓치는 영화 속 사내들의 방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유일한 애니메이션 영화인 <로망은 없다>는 주제 면에서도 앞의 3편으로부터 비켜 서 있다. 부모의 결혼기념일에 온 가족이 모여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띤 이 영화는 ‘아무런 로망 없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온 우리 부모 세대의 무미건조했던 삶을 추억한다.

한국적인 그림과 토속적인 스토리가 매력적이지만, 습작의 느낌이 남아 있어 아쉽다. 다만 보통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비의 10%도 안 되는 초저예산(2억원)으로, 짧은 제작 기간(1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격려의 박수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10~16일 서울 압구정씨지브이에서 <나는 곤경에 처했다>와 <너와 나의 21세기>를 개봉하며, 같은 기간 부산 서면씨지브이에서는 <여자 없는 세상>과 <로망은 없다>를 개봉한다. 17~23일에는 서울과 부산의 같은 극장에서 서로 작품을 바꿔 상영을 이어간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한국영화아카데미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