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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동성애 영화라고 ‘희망’을 버리오리까

등록 2009-12-13 22:06

김조광수 감독
김조광수 감독
‘친구사이?’ 김조광수 감독
낭만적으로 그려진 ‘커밍아웃’
감독의 맑은 품성 닮은 영화로
“다음엔 30대 동성애 찍을 예정”




#소년, 소년을 만나다

유난히 명랑하고 쾌활한 소년이 있었다. 중3 때, 친구들이 돌려보던 ‘빨간책’을 우연히 접하고, 자신이 여자 육체에 끌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같은 반의 한 소년을 좋아하게 됐다. 어렵사리 고백했는데, 친구도 같은 감정이었다는 걸 확인했다. 손을 잡고 뽀뽀만 했다. 친구는 금세 전학을 갔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책을 찾아보며 깨닫게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걸, 옛날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걸.”

#구호보다 율동을 좋아했던 학생회장

춤추고 노래하는 게 좋았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학예회를 앞장 서서 기획했다. 다른 반 애들이 모두 집에 간 방학식 날, 책상을 물려놓고 무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한양대 연극영화과(83학번)에 진학했다. 학생운동을 시작한 것도 ‘끼’가 발동한 결과였다. 특별한 정치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주목받고 싶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내부의 강퍅한 공기는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명랑하고 쾌활했던 그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 괴로워하던 그는 군대로 숨었다. 1988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학교는 조금 변해 있었다. 숨 쉴만한 틈이 있었다. 복학생의 신분으로 인문대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연극영화과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다른 학생회장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를 외칠 때 그는 가무단을 만들어 율동을 가르쳤다. 지금의 걸그룹들처럼 아기자기한 율동을 하는 그를 보고 학생들은 신기해했다. “얘, 저 사람 복학생이래!” 엉겁결에, 1993년 한총련 출범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영화 ‘친구사이?’
영화 ‘친구사이?’
#동지들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던 고통


학생 운동 시절, 게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잘못하다가는 조직 전체가 ‘호모들의 난장판’으로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친한 후배에게 털어놓고 싶어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90)를 슬쩍 보여줬더니, “호모가 어떻게 노조 간부가 될 수 있느냐”며 불쾌해 하는 바람에 지레 포기했다. 뜻이 같은 사람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게 슬펐다. 그렇게 수십 년을 망설이다 10년 전쯤에야 가까운 친구에게 고백했다. 대중을 향해 커밍아웃하게 된 건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2006년 겨울이었다.

#진짜 동성애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10년만의 졸업 뒤, 전공을 살려 영화 판에 뛰어들었다. 연출이 아닌 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연출을 하려면 작가주의 감독이 돼야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같은 예술영화가 지루하고 졸립기만 했던 그는 스스로 연출 욕심을 접었다.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만드나.” <해피엔드> <와니와 준하> <귀여워> 등을 제작할 때만 해도 “역시 감독들은 달라”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이 감독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난해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를 만들어 감독의 꿈을 이뤘다. 이제 곧 중편 <친구사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년…>은 10대, <친구사이?>는 20대 게이들의 이야기다. 지금 30대 게이들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70분짜리 장편이 될 거다.


영화 ‘친구사이?’
영화 ‘친구사이?’
#감독을 닮아 밝고 명랑한 <친구사이?>

제작자와 영화감독의 겸업을 선언한 김조광수(44) 청년필름 대표의 두번째 영화 <친구사이?>는 밝고 맑은 그의 품성을 닮은 영화다. ‘모든 동성애 영화는 <해피 투게더>(1997, 왕자웨이 감독)의 각주’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두운 동어반복을 일삼았던 기존의 동성애 영화들과 달리, <친구사이?>는 밝고 희망차다. 20대 게이들의 최대 난제인 군 입대와 커밍아웃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이 제거된, 표백된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현실의 불안한 그림자를 플롯의 극적인 밑동으로 삼아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만들어낸다. 김조광수 감독은 “이성애자들이 주변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봐줬으면 한다”며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은 지나치게 위축돼 있어 극장에 오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가 있는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니까 느긋하게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대중적인 감성을 살려 이준익 감독처럼 되는 게 꿈”이라며 “돈을 많이 벌어 동성애 커뮤니티를 위한 교육센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17일 개봉.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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